07. 집착
5월 18일
[꿈결에 놓쳐버린 자취,
애타는 가슴은 어떻게 하라고,
그리움만]
오랫동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쓸쓸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그림만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직원은 잘 모른다는 말뿐이다.
’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가족 여행이라도 떠났나, 혹시 어디 아픈 것인가, 아프다면 직원이 그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함은 매주 수요일마다 쌓여만 가지만 그녀의 전화번호. 주소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설령 전화번호를 안들 전화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더 이상 직원의 눈치가 보여 수요일 방문도 삼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애타는 마음에 비해 이렇게 아무 소식을 얻을 수 없는 그녀의 무심함이 야속했다.
그림을 그리려고 이젤 앞에 앉았지만, 도무지 정신집중이 되지 않는다. 갑자기 할 일을 찾지 못한 그는 평소 생각했던 집에 운동기구를 사들이고 매일 아침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피부과를 찾아가 얼굴 피부 미백 치료도 시작했다. 아직 무성한 반백의 머리는 그대로 염색하지 않고 중후함을 살려보자 마음먹었다. 귀찮아 미루어 왔던 자기 관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5월 31일
어느덧 그녀를 보지 못한 지 한 달이나 지났다. 소식이 궁금하긴 하지만 선뜻 발길이 닿지 않아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말자’ 마음먹기도 했었다. 그간 일상이 귀찮고 무료할 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마음도 식어 화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을씨년스럽다. 금방 비라도 내릴 것 같다. 금 년 여름은 장마가 길다고 하는데. 그런 날씨에 괜한 짜증을 부려보기도 했다.
문방구 앞을 지나면서 요즘 어쩌면 그 여자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수요일은 한번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앞을 지나치며 길가에 서 있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 차를 길옆에 세우고 뒤돌아보았다. 그 여자가 맞았다. 갑작스러운 반가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늘 면도도 하지 않은 자신의 꼴을 생각하며 잠시 망설였지만, 그는 후진으로 그 여자 앞에 세웠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금방 알아보고 환하게 웃는다.
“아~ 정말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셨어요!”
“어디 가세요?” 그는 굳이 택시로 가겠다는 그녀를 태우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행운같이 생긴 우연에 그는 기뻤다. 단둘만의 공간과 신선한 향기에 짜릿한 흥분이 몸을 감싸 안았다. 그간 잊었던 오감이 모두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요즘 가계에 잘 안 나오신 것 같던데” 잠시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속에 그가 말을 걸었다.
“예~ 몸도 좀 안 좋았고 처리할 집안일도 많았어요.” 그리고 보니 그녀의 표정이 조금 지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차를 안 갖고 다니세요?”
“아 제가 아직 운전을 못 해요, 면허증 딴지가 십 년이 넘었지만, 아직 장롱에 있어요. 하하하”
“그럼 불편하지 않으세요?”
“불편하죠. 그런데 남편이 운전을 못 하게 해서요.”
“아~ 남편분이 부인을 끔찍이 생각하나 봅니다. 하하하”
“원래 집안이 좀 완고해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아파트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입구에서 그녀는 내렸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가슴은 잠시 식었던 그녀에 대한 마음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차가 없다니 그럼 시간에 맞춰 퇴근을 시켜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자니 그녀가 당연히 부담을 갖게 될 것이고 스토킹으로 오해할 수도 있어 가당치 않은 생각이라고 판단을 했다.
6월 2일
연일 계속 장맛비가 내리는 어설픈 오후,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눈을 의심했다. 뜻밖에 문구점이다. 흥분과 기대감으로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하하하! “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오래 못 뵈었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
“아니에요, 다름이 아니고 제가 드디어 가게를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인사 겸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주문을 해드리려고요. “
“예? 어떻게 그리 갑자기 “ 너무 의외의 소식에 머리가 멍해진다.
“어제 가계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 계약을 했어요. “
“그럼 이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집에 계실 것인가요? “
“예, 이제는 집에서 육아만 집중하려고요,“ 그는 앞으로 그녀를 쉽게 볼 수 없다는 걱정이 앞섰다.
6월 8일
그는 오늘 그녀와 연결 고리를 놓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문구점을 찾았다. 구매품 리스트를 받아 든 그녀는 찹찹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 그림은 제가 가지고 저의 집에 걸어놔도 될까요?”
“그럼요!. 제가 선물한 것인데요.”
“선생님을 처음 뵐 때가 생각이 나네요, 화가라고는 미처 생각 못 하고 어느 학교 선생님이신 줄 알았어요.”
“그때가 벌써 오래전 일입니다, 그간 고마웠는데 이제 뵙기 어렵나요?”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즐거웠는데 아쉽습니다.”
“가끔 친구라 생각하고 소식이나 전하면서 지내면 어떨까요.” 그는 나이 든 체면도 불사하고 다급함에 절실한 속마음을 내보였다.
“아~ 그래요. 좋은 일 있으면 종종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선뜻 본인의 전화번호를 내주었다.
[고 은지]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나마 그는 개인적 관계가 연결됨을 기뻐하고 다행으로 생각했었다.
이때 그녀의 전화기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예 지금 공사할 사람을 알아보고 있는데, 다음 주까지 연락드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왜 그러세요. 안 좋은 일이세요. 무슨 공사할 일이 있어요?”
“예, 아닙니다, 머리가 좀 아프네요, 참 선생님 건설회사에 계셨다고 했지요.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우리 아파트가 발코니 부분이 물이 새서 벌써 두 번이나 보수를 했지만 도통 잡히지 않는다는데, 아래층 세대에서는 피해를 계속 주장하고 있고 보수했던 업체는 매번 비용청구만 하며 이제는 아예 연락도 되지 않아 스트레스가 심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그녀의 표정이 상황을 보여 준다.
'이런 일은 남편이 나서서 해결해야 될 일인데 여자가 골치 아파할 일인가' 싶어 그때 터미널에서 봤던 선글라스의 젊은 친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부탁하면 처리해 주지 않나요.” 그러나 그곳은 이렇게 하자가 재발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어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해결해야 할지를 잠시 망설였다. 사실 어렵고 잘해야 본전 되는 일이었다. 한 번의 작업으로 보수가 완료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녀가 받을 스트레스와 고통은 배가되어 결코 그에게는 이로울 것이 없는 모험을 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어려움을 알기에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잘 처리해 보도록 할게요.”
6월 10일
재호는 곧 옛날 다니던 직장 후배에게 부탁하여 전문가를 동원하기로 했다. 그 또한 모든 일을 접어두고 이 일에 달라붙어 우선 처리해야 했다. 일이 잘 해결되어야 할 터인데 하는 긴장감과 그녀는 과연 어떤 집에 살고 있나 하는 호기심으로 전문가와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그녀에게 익숙한 향이 먼저 맞이한다. 아파트는 생각보다 꽤 넓어 보였고 그녀의 분위기에 어울리듯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한편에 걸려 있는 자신의 그림을 보자 한층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예상대로 남편은 보이지 않고 대신 친정어머니인듯한 노인과 함께 그녀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노인은 거동이 조금 불편해 보이기는 하지만 곧은 몸가짐과 깔끔한 미모는 그녀의 어머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였다.
“누수 부위가 바닥난방 배관인지 외벽에서 침투한 빗물인지 발코니 배수관 인지 정화한 원인을 알 수가 없어요.”
그간 과정을 설명한 그녀의 얼굴에 심란한 표정이 역력했다.
“탐사 장비를 가지고 정밀조사해 원인부터 찾도록 하지요, 공사 중 며칠 거주하시기에 불편하셔서 그렇지, 어려운 일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커피잔을 놓고 일어섰다. 거실에 걸린 사진으로 딸이 한 명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6월 15일
작업은 3일 만에 끝냈다. 난방 배관에 이상이 있었더라면 시일이 오래 걸렸을 텐데 다행히 물은 외벽을 타고 들어와 바닥을 통하여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원인이 아파트 공용 부분의 하자로 판명되어 비용도 관리실에서 부담하도록 처리해 주었다.
작업하는 동안 그녀는 가계를 정리하느라 집엔 없었지만, 그는 매일 현장에 들러 작업 사항을 살펴보았다. 그는 실수하지 않으려 신경을 썼다.
“앞으로 큰비가 와봐야 그 결과를 알겠지만 이젠 이상 없을 터이니 안심하세요.”
감사한 마음에 둘은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지난번 식사했던 그 경양식 집이다.
“이렇게 폐를 끼쳐도 괜찮은지 걱정되네요.”
“아닙니다. 도와드릴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앞으로도 또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아시다시피 그 집에 저와 엄마 그리고 딸 셋이 살고 있어요. 옛날에는 남편이 모든 일을 맡아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음료수 한 모금을 마셨다. 곧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하여 그를 당황하게 했다.
“아니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이런 말씀드리는 것은 창피하지만, 지난번에 저에게 큰일이 있었어요, 이미 집에 오셔서 눈치채셨겠지만, 우리 부부 갈라서고 말았어요. 그때 무척 힘들었지만, 겨우 지금 괜찮아진 거예요. 괜한 이야기 해서 너무 죄송해요.” 그렇지 않아도 집 어디에서도 남편의 흔적을 볼 수 없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녀의 고백은 충격이었다. 그녀는 지금 생에 말할 수 없는 큰 변화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떠나간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름다워진 풍경들이
내 눈이 아닌 네 마음에 비쳐 저토록…
너의 목소리는 나의 위안이요.
너의 웃음은 나의 희망이니
오로지 널 위해 오늘이 있고
너로 하여금 내일의 꿈을 꾸나니
목이 메는 기쁨으로 너를 만났고
온몸 눈물로 너를 보내며
내일은 해가 뜨고 거리에는 바람도 불겠지
나는 삶의 의미로 너를 보았으며
너는 날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면
이젠 너의 노래만 남았고
너의 그리움은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너는 정녕 나의 전부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