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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 - 고은지

08. 고은지

by 왕십리

고 은지


은지는 이천의 한 가정에 외동딸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엄마는 대단한 미인으로 지역에서 유명하였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이었지만 자존심과 의지가 강한 여자였다. 교육대학을 나와 교편생활 중에 같은 학교 교사인 남편의 오랜 구애 끝에 결혼했으나 딸을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불행하게도 병으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말았다.

졸지에 닥친 불행 앞에서, 결국 이런 것이 운명이라면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앞날은 스스로 개척해 보겠다는 강한 의지로 거듭났었다. 많은 재혼의 구애와 유혹으로부터 딸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자존감이 강한 그녀는 재혼이란 딸과 자신이 팔려간다는 생각에 허용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딸에게 아빠 자리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엄마의 정을 넘치도록 쏟아부었다. 덕분에 어린 시절 엄마의 보호 아래 그녀는 예쁘고 바르게 잘 자라주었다. 그녀가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자 엄마는 교직을 서울로 옮겨 딸과 같이 생활을 했다. 학생 때 미모가 뛰어났던 그녀는 엄마의 엄격한 관리하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고 또한 미인대회나 광고모델 등 많은 제안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듯 모든 것을 항상 엄마와 함께했다. 이렇게 점점 자신의 모습을 닮아가는 딸과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녀는 과부라는 이미지를 털고 당당하게 사회에 나설 수 있었다.


그녀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엄마는 그녀의 반려자를 직접 찾아 나섰다. 딸의 외모를 앞세워 고향 이천 지역을 탈탈 털어 드디어 내놓아라, 하는 집안을 골랐다.

그녀의 남편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미국 유학 중인 학생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일정시대 큰 한약방을 운영하여 지역에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호였고 아버지는 당시 집권당의 유명 정치인이었다.

시내가 떠들썩하게 결혼식을 치른 그들은 누가 봐도 한 쌍의 원앙이었다. 결혼하자 바로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그곳에서 생애에 가장 아름답고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지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고 시댁의 배려로 별도의 살림을 꾸려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은 그녀에게 헌신적이었고 그녀 또한 이러한 남편을 사랑하며 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낸 끝에 예쁜 딸도 얻었다.


그렇듯 그녀만을 위해 세상이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때부터 그녀는 알 수 없는 무료함과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딱히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일상에 뭔가 부족함이 있었다. ’너무 생활에 변화가 없나? 운전도 못 하게 하는 남편의 과보호 때문인가?‘

그녀는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사회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에 남편과 상의 끝에 밖에서 할 일을 찾았다. 너무 상업적이지 않고 힘들지 않으며 그녀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을 업종으로 문구점이 제격이라 생각하고 시댁 소유의 건물 1층에서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욕과 호기심으로 시작한 사업, 시작한 지 1년이 지나자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은 생각보다 힘이 들고 보람도 찾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 엄마의 손을 필요로 하는 딸아이 모습에 그녀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요구하여 시작한 일인데 남편에게 내색도 할 수 없었다.


큰 변화는 또 있었다. 집에 옛날 같은 포근함 대신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허전함은 그녀의 생활을 불안하게 했다. 그 원인을 찾다 보니 뜻밖에 남편에게서 그 원인을 발견했다. 같이 있어도 멍한 초점 없는 남편의 표정, 수동적인 배려, 그리고 항상 곁에 머물렀던 예전과 달리 혼자 하는 시간이 늘어난 점 등 분명히 달라진 남편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사업한다고 남편에게 이전같이 신경을 못 쓴 탓이려니 생각하고 오히려 남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적당한 기회에 남편에게 사업에 대한 문제를 다시 논의하려고 생각했다.

완벽을 추구했던 삶에 먹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몰랐던 그녀의 앞에 어느 날 상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술을 전혀 입에 대지 못하는 남편이 밤늦게 잔뜩 취해 들어왔다. 인사불성이 되어 침대에 쓰러진 그는 잠꼬대 같은 말을 주절댔다.

“당신이 불쌍해. 미안해! 은지야 미안해! 이제 너를 사랑할 수가 없어! 어떡해! 나를 용서ᆢ...ᆢ” 그녀의 팔을 잡고 이내 곯아떨어진 그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보였다.

'이것이 무슨 소리지? 잠꼬대인가? 취하여 착각을 하고 있나? 아니다 분명히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가?'

그녀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싸늘한 느낌과 함께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분명히 뭔가 있다.' 요즘 느낀 남편의 분위기와 뭔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싸늘한 아내의 표정을 보고 차려놓은 아침밥도 먹지 않은 채 서둘러 출근했다. 자존심상 먼저 물어보지 못하고 남편이 먼저 무슨 이야기를 해주길 기다렸지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 3일이 지나도록 서로 대화도 없이 그녀는 속만 태우고 있었다.

'이게 부부 싸움이라는 것인가?' 그녀는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몰랐다. 결국, 견딜 수 없던 그녀가 먼저 그날 일을 꺼냈다. 그녀 앞에 고개를 숙이고 최최하게 앉은 남편은 옛날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단순히 해프닝으로 끝나길 간절히 바라던 그녀는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직감으로 알았다. 한참 만에 입을 연 남편의 청천벽력 같은 고백에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일 년 전부터 자신의 제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이미 사내아이까지 낳았다는 말에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녀의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지 않았고 이미 사태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 있었다.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갔다. 온실 속의 꽃보다 생기발랄한 야생화를 찾아 떠났다. 며칠을 집에 남아 앓아누운 그녀는 현실이 제대로 믿어지지 않았다. 남편의 마음만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 용서하고 해결책을 찾을 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혼자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웠던 그녀는 그렇게 알리기에 두려웠던 엄마에게 사실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남편의 사망 이상의 충격적인 소식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불행을 직감했다. 자신의 생을 걸고 길러낸 딸만큼은 자신의 전철을 밟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에 우선 사위를 불러 질책도 하고 타일러도 보려 했지만, 면목이 없는 사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모든 사실을 알리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사돈댁을 찾아갔다. 그들도 날벼락 맞은 소식에 아들을 원망하고 탓하며 다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백배사죄의 마음을 나타냈다.

“아들아! 동래 창피해서 못 살겠다. 우리 집안과 아버지 얼굴에 먹칠해도 유분수지 어쩌자고 일을 그 지경까지 만들었나, 더구나 교수라는 사람이.” 그들은 아들을 야단을 치고 어떻게 하든 마음을 돌리려 타일러 보았지만, 그 여자를 버릴 수는 없다는 아들의 완강한 태도와 갑자기 나타난 손자에 대한 기쁨이 어울려 갈등의 시간만 길어졌다. 기다리던 핏줄에 대한 반가움도 버릴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사돈에게서 별로 기댈 것 있어 보이지 않자 엄마는 앓아눕고 말았다. 자존심이 강한 엄마는 병상에서 딸의 손을 잡고 이혼을 결심했다. 갑자기 뒤죽박죽 되어 버린 생활에 견딜 수 없었던 그녀도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어린 딸을 위해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다. 결국, 남편은 딸의 양육권과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그 여자에게로 떠났고 시댁에서는 남은 모녀를 위해 평생 어렵지 않도록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강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절망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고 엄마도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마음의 병은 치유하지 못했다.



6월 8일


어찌 그런 여자에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러니까 금 년 여름 가게에 한동안 나오지 않았던 때였던 것 같았다. 온실의 꽃 같은 그녀에게 그 시련은 너무 가혹했으리라. 가슴이 아프다. 그는 조용히 화실로 들어가 이젤 앞에 앉았다. 자꾸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그려보고 싶었다. 초상화는 처음이지만 어떻게 하든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머리, 얼굴윤곽 그리고 눈 그리고 눈,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상상 속 그녀의 오묘함은 표현할 길이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잘못 그녀에 대한 호감이 흐려질까 두려웠다.

[어찌 내 눈에 보여

이 어려운 밤 지나게 하고

어찌 내 귀에 들리게 하여

이토록 헤매게 하는지

곧 봄은 가고 바람도 가는데

너의 웃음, 그냥 그렇게 보낼 수 없고

너의 나래, 나는 끝내 보낼 수가 없다]


생각같이 너무 자주 그녀 앞에 보이는 것도 나이 든 사람으로 좋은 모습이 아닌 것 같아 그는 속도 조절에 나섰다. 다음 달에나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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