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미경
이미경
미경이는 오늘도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감기로 고생하는 아이의 열이 내리기는 했지만 아직 정상은 아니다. 겨우 아이의 재워놓고 그녀는 커피 한잔할 틈을 얻었다. 창밖에 발가벗은 체 하얀 얼굴만 드러낸 목련이 자신을 봐 달라는 듯 흔들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처녀 때 백일청천 일생이 화려할 것 같았던 시절이 그립다. ‘내가 너무 일찍 결혼을 했나? 아니 너무 일찍 아이를 가졌나?’ 그녀는 자신이 지금 산후 우울증이 아닌가 두려웠다.
‘빨리 아이 병원부터 다녀오자.’ 그녀는 아이의 짐을 챙기려다 옷장 서랍에서 아이의 산부인과 출산기록부를 발견하고 새삼 열어보았다. 그녀는 거기 한 곳에 초점이 맞춰지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혈액형 AB,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는데 이게 왜 이렇게 쓰여있는 거지? 나는 B형이고 남편은 O형인데 AB형이라니 말이 안 된다, 뭐가 잘못 적었겠지!’ 그녀의 등줄기가 싸늘해지더니 곧 불안은 공포로 변하기 시작했다.
‘설마!’ 뇌리에 스치는 그때 그일. 그녀는 전기에 감전되듯 섬뜩함을 느꼈다. 그 선배! 그 사람이 A형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일과 남편하고 관계했던 것이 한 달 이상 차이가 있는데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가슴은 두근거리고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가만히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당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남자들이 여럿이 있었음에도 유독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그 선배에게 마음이 끌린 나머지 그녀가 더 적극적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남은 2년이 지나고 당연히 결혼까지도 생각했던 그녀와는 달리 선배는 졸업이 가까워질 때까지 결혼에 대한 말이 없었다. 답답한 그녀가 물었다.
“선배는 결혼 상대로 어떤 여자가 좋아?”
“결혼? 나는 아직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설마 했으나 그는 급기야 졸업 후 서둘러 군에 입대했다.
“기다리지 마! 부담이 돼서 싫어! 혹시 제대할 때까지 우리 서로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때 생각하도록 하자!” 야속하고 무책임하게 마무리하듯 떠난 그 사람. 오랜 배신과 실연의 아픔은 오로지 미경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방황하던 중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인물과 집안은 내세울 것 없지만 학력과 직장이 좋고 인상과 성격이 유순하였다. 특히 미경이를 너무 좋아하여 결혼 상대자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그와 만남은 아무런 자극과 설렘을 느끼지 못하고 무료하기만 했다. 아마도 그 선배에 대한 미련이 그녀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고 있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그 선배가 제대하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다시 시작된 선배와의 만남, 그녀는 속초 여행지에서 선배와 결국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만나는 남자 있다며?” 올라오는 동안 내 말이 없었던 선배는 서울에 거의 도착할 때쯤 무표정한 얼굴로 불쑥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친구가 그러던데, 시치미 떼지 말고.”
“그래! 친구같이 만나는 사람이야.”
“그래! 잘됐네.”
“잘되긴 뭐가 잘돼! ”
“좋은 사람 같은데 결혼해라!” 그녀는 모멸감으로 몸이 떨렸다.
“나 다음 주에 유학 떠날 거야! 한 3년 이상 걸릴 거야! 미안해!” 미경은 너무 어이가 없고 분노가 치밀어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
‘야! 너 뭐야? 네가 뭐가 대단하다고 나한테 그래도 되는 거야? 나를 그동안 가지고 놀았지!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어? 그간 너에게 버린 시간이 아까워 여기까지 끌려온 내가 못났지만, 너도 주제 파악 좀 하고 살기 바란다. 네 명대로 살고 싶으며! 알았냐? 개만도 못한 놈아!' 그렇게 욕을 해주지 못하고 허둥지둥 내린 자신의 꼴이 원망스러웠고, 이제까지 자존심 모두 버리고 끌려다닌 자신이 가슴 치며 후회가 될 뿐이다. 소위 나쁜 남자 좋아하는 여자의 말로라고 생각했다.
‘그때 분명히 피임을 했는데!’ 생각해 보니 두 사람과의 관계한 날의 간격이 얼마였는지도 분명치가 않다. 한 달은 훨씬 넘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럴 것이 아니라 우선 아이와 자신의 혈액형을 정확히 확인해 봐야겠다. 뭔가 잘못이 있을 거야!’
병원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그녀에게 검사지가 전해졌다. 급하게 아이부터 확인했다. ‘AB형, 이미경 B형.’ 달라진 것이 없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럼 남편 혈액형은 맞는 것일까? 맞다 면은 어떻게 되나? 그렇다면 혹시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뀌지는 않았나? 아니면 산후조리원에서 잘못될 수도 있을까? 아니야! 산후조리원에서는 불가능해! 그때는 내가 아이 얼굴을 뚜렷하게 기억했었으니, 남편에게 혈액검사 해보자고 하면 뭐라고 할까?’ 자신이 없고 무섭다! 그는 드라마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 그녀는 머리를 감쌌다. ‘그럼 선배란 말인가?’ 그녀는 자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남편보다 선배를 더 닮아 보이기도 했다. ‘이를 어쩌나?’ 험난한 아이의 앞날을 그리며 그녀는 점점 막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우리 동우는 어떻게 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목이 메었다. ‘잘못되면 당연히 남편은 이혼을 요구할 것이고, 아들은 편부모 밑에서 그 긴 세월을 견디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외로움을 타는 아인데, 그래! 언제까지 숨길 일이 아니다. 길은 하나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혈액형을 확인하자. 그래서 결과가 A형이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설령 결과가 최악으로 나온다고 할지언정 무슨 수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 후 그녀는 남편과의 잠자리가 위축되고 불편했지만, 다행히 남편은 몸이 아프다는 그녀를 위해 배려와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런 남편이 고맙기보다는 그럴수록 더 불편하고 앞날이 암울해졌다. 며칠을 고민하며 방법을 찾던 중 남편의 혈액형을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적십자에서 아파트 단지에 헌혈을 호소하는 캠페인 방송이 나왔다.
“오빠! 우리도 헌혈하자. 젊었을 때 하면 그것이 저축이 되어 나중에 우리나 가족이 아플 때 쓸 수 있다고 하잖아.”
“헌혈? 자기는 몸도 아픈데 무슨 헌혈을 한다고 그래!”
“아니지! 오래된 피가 빠져나가면 새로운 맑은 피가 보충되어 건강에도 더 좋데요.” 남편은 그녀의 말에 반대하는 법이 없다.
며칠 후 이동 진료소에서 팔에 솜을 대고 나오는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혈액형 체크 했어?” 남편은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거참 이상해! 내 혈액형이 A래!” 그녀는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몇 개월을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 마음고생 한 것 생각하면 원망과 안도의 기쁨이 교차하며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그러한 마음을 내색할 수도 없었다.
“참! 신기하네. 초등학교 때 검사에서는 분명히 O형이라고 해서 나는 계속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네.” 그녀는 한순간 맥이 풀려 주저앉고 싶었다.
“아니! 군대까지 갔다 온 사람이 자기 혈액형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거야?”
“하하하, 그게 군에서는 입대할 때 자기 혈액형을 자기가 써내게 되어 있어 검사를 따로 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알 수가 없었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남편을 마음껏 때려주고 싶었다. 그렇듯 혈액형 해프닝에서 해방된 기쁨도 잠시 자신이 고생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 억울한 나머지 모든 고통의 원인을 남편의 탓으로 돌렸다.
‘사람이 그렇게 무지할 수가 있나?’ 20년을 넘게 자신의 혈액형도 제대로 몰랐던 남편이 이해되지가 않았다.
두 팔 벌려 하얀 미소로 품에 안길 듯 달려온 파도는 결국 발밑에 엎드려 절하며 물러선다. 정근이 마음에는 항상 이렇게 맞아주는 동해의 바다가 있다. 오늘 아내와 아들과 함께하는 이곳 해변은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나오니까 좋지 않아.”
“바람이 상쾌한 것이 너무 좋아! 그럴 줄 알았더라면 진즉 데리고 올 것을, 미안해 늦어서, 이제 자주 나오도록 하자. 네가 좋아하면 나는 다 좋아!”
“하하하! 말이라도 고마워.” 아내의 환한 표정이 그를 더없이 행복하게 한다. 바닷바람 속에서 아내를 코트 자락으로 안은 채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자신은 모든 것을 다 가졌노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모래사장을 혼자 뛰어노는 아들을 보고 그는 아내를 힘주어 안으며 이야기했다.
“우리 딸 하나 더 갖자.”
“안돼! 그것은 안돼! 나 힘들어.”
“동우가 너무 외로워 보이지 않아?”
“요즘 아이 두 명 갖는 집 드물어. 동우 하나만으로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더 나아!” 미경이는 진저리를 친다. 그는 아내의 뜻에 따라 횟집에 들어와 보니 아이 식사가 마땅치 않자 밖으로 나가 피자를 사 가지고 들어 왔다. 이미 차려진 푸짐한 횟거리에 아내는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과 술 몇 잔은 그를 설레게 하고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숙소에 들어와 아들이 지쳐 잠이 든 것을 확인한 그들은 동시에 가운을 벗어던지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마치 처음 만난 사이 인양 정근이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허둥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들어 올려 남편을 감싸던 그녀는 순간 불현듯 그 못된 선배와 같이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바닷가였다. 하필이면 이때에, 그녀는 그때 느낀 희열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쾌감을 결국 온몸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여 오는 황홀감과 밑에서 쳐 오르는 오르가슴에 그녀는 몸을 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정근이는 뜻밖의 그런 미경의 반응에 한껏 달아올라 정신없이 파도치는 그녀의 몸 위에 매달려 헤엄쳐 들어갔다.
“사랑해 여보!” 끝난 격전지에 흐드러진 미경의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반짝였다. 그 눈물의 의미가 깊은 만족감인지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인지는 본인도 잘 몰랐다. 상상외로 황홀한 밤을 보낸 정근이는 온몸이 날아갈 것 같이 행복했다. 역시 자연 속에서 원초적인 힘의 위대함을 실감한 듯했다.
“우리 앞으로 이곳에 자주 와야겠다.” 남편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본 그녀는 자신은 정말 천성이 나쁜 년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동해에 다녀온 후 그들은 가끔 그곳을 찾았고 그때마다 그녀는 그 나쁜 선배를 생각하며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제 남편에게 미안함도 느끼지 못했다. 덕분에 그녀의 우울한 기분은 많이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