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고통
7월 27일
재호는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호텔 라운지에 앉아있는 그는 모처럼 한가한 마음이었다. 이런 곳에서 커피 마시던 때가 언제였던가. 그때가 그리워진다. 그 짧은 시간에 달라져 버린 처지가 서러워진다. 막상 그곳에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두려워 차량 수리기간 만이라도 아내 옆에 있고 싶었다. 그러다. 아내의 채근에 내키지 않은 정 회장과의 점심 약속에 이끌려 나왔다. 정 회장은 아내의 옛 교사 시절 교감으로 은퇴한 선배로 부유하고 각계에 발이 넓어 아내가 사업을 시작할 때 도움을 많이 주고 있는 사람이며 몇 번 식사자리를 같이 한 사람 이이기도 했다.
“송 선생! 오랜만입니다.”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정 회장의 생기 어린 얼굴과 호기 있는 태도에 그는 움츠러든다. 예전에는 돈 좀 있다고 거드름 피는 그런저런 노인네라고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던 사람 아닌가.
"김 여사! 어쩌자고 날로 날로 더 젊어지십니까?"
“회장님은 별말씀을 다 하세요.”
“아닙니다, 보세요, 오늘 의상이 김 여사 분위기에 너무 잘 어울려 아주 고결해 보이십니다.”
“하하하 너무 태우지 마세요. 떨어지면 저 죽습니다.” 그는 듣자 하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었다. '남편이 버젓이 곁에 앉아있는데 남의 여자 외모를 가지고 이렇게 장황히 늘어놓아도 되나?' 또 그런 치레 말에 너무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도 생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편치 않아 이 자리에 나오기 싫었는데 그는 기분이 상했다.
“회장님 정말 이번일에 수고가 많으셨어요. 감사드립니다.”
“아! 수고라기보다 다행히 아는 사람이 그곳에 있어 쉽게 된 것입니다. 다 김 여사 복입니다. 앞으로도 그곳 일은 계속 많을 거예요." 이번 정 회장의 도움으로 학교에 급식 빵을 납품하게 되었다. 그도 고맙다고 인사하고 해야 할 자리인데도 그의 어두운 처지가 모든 것을 비정상으로 느끼게 했다. 식사하는 동안 그가 별 말이 없자 두 사람은 간간히 그의 눈치를 살핀다.
“그럼 납품일은 언제예요?”
“예! 한 달 내로 착수계를 제출하라고 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처음 하는 것이라 서류를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어요."
“서류나 양식 등 자료가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내가 그 친구에게 부탁하면 바로 보내줄 것입니다.”
“예?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주신다면 너무 좋습니다.” 예전보다 한층 더 친밀해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그의 표정이 븕어졌다.
“아니 그런 것쯤은 당신이 사람 시켜 직접 알아보면 되지 뭘 귀찮게 그런 것까지 회장님께 부탁을 하고 그래요!” 갑작스러운 그의 짜증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것 인터넷 찾아보면 나올 것 같은데 바쁜 분에게 쓸데없이 폐를 끼치나!” '아차!' 후회하기는 늦었고 그는 내친김에 화풀이하듯 한마디를 더 밀고 나갔다.
“아! 회장님 죄송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닙니다. 뭐 폐랄 것 없지만 그럼 그렇게 하세요. 일반 양식이라서 인터넷에도 있을 겁니다.” 당황한 두 사람은 황급히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 정 회장과 헤어져 집에 올 때까지 아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편의 상태가 뭔가 정상이 아니라 생각했다.
8월 1일
요즘 건강에 신경을 쓴 탓인지 모처럼 오늘 아침 컨디션이 좋다. '이제는 괜찮을 거야. 처음 맘고생에 비하면 이젠 견딜만하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고 달라질 것 없다면 이젠 그 악몽에서 벋어나 잊도록 하자.'
재호는 뒤뜰로 나왔다. 마치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직 버티고 있는 장미꽃들이 모처럼 눈에 비친다.
한 여름에도 어름장 같은 자신의 마음이 한없이 가엽기만 했다.
오늘 유난히 그녀가 그립다. 그간 너무 무섭고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이 그녀를 오염시킬까 두려워 감히 만나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봐야겠다. 태연하게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다.’ 갑자기 마음이 들뜨고 바빠진다. 그는 집으로 들어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달라진 내 모습에 그녀가 실망하지는 않을까? 내 눈빛과 표정은 예전처럼 온화하고 자연스러운가? 이발도 해야겠다.'
그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지금 시간에 전화해도 괜찮을까?' 신호음 가는 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어머! 송 선생님 안녕하세요?” 은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
“예, 안녕하시지요?”
“예, 잘 있었습니다. 별일 없으시지요, 그런데 웬일로?” 이유 없이 왜 전화했느냐는 듯한 반응에 그의 부풀던 가슴이 식어 내리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한시도 잊어본 적 없이 마음을 태웠는데, 더구나 그 사건이 벌어진 순간에도 가장 먼저 그녀부터 생각했는데.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너무 혼자 감정에 빠져 앞서가고 있구나.’
“아! 예, 지난번에 비가 많이 왔는데 괜찮았어요?”
“참! 인사가 늦었네요. 감사합니다. 전혀 새는데 없이 완벽합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사실 은근히 걱정 많이 했었지요.”
“송 선생님께 진즉 부탁드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라도 송 선생님을 만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잠시 대화가 멈췄다. 그는 오늘 전화 목적의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매번 식사 접대를 받아서 오늘은 내가 점심을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이 어떠세요?”
“식사요? 하하하, 괜찮은데요, 제가 송 선생님께 고마워서 했던 것인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 제가 약속이 있어요.” 어쩌면 앞으로 영영 만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 싶어 그는 더 적극적으로 나갔다.
“아 그러면 내일은 어떠신지요, 내일 하면 되지요. 그간 어떻게 지내시는지도 궁금하기도 합니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채근하여 결국 내일 그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8월 2일
들뜬 마음에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두 달여 만에 만남이다. 모든 것이 사고 이전 상태로 되돌려진 기분이다. 어두운 지난 일은 이제 잊어도 된다. 용기를 내고 자신감을 갖고 살자, 아침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어제 미리 생각해 둔 복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집을 나섰다. 그는 식당 문을 들어서기 전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어머 좀 마르셨어요. 어디 아프셨어요.” 여전히 환하게 빛나는 은지의 모습. 이 여자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느낀다. 당장 자신의 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은 가득 차오르지만 그나마 행여 다시는 그 얼굴 보지도 못할까 두려워 감히 내색할 수가 없다.
“예! 나는 요즘 몸살로 고생을 좀 했지요. 어떻게! 지냈어요. 더 젊어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처음 그녀를 만날 때와 같이 생기가 살아나고 편안해 보였다.
“그동안 여러 가지 정리할 것이 많았어요, 수영도 다니고 요가도 하면서 밝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정말 보기가 좋습니다,”
“그림은 많이 그리세요. 재료 구입은 어떻게 하세요?”
“아! 그게 요즘 몸도 그렇고 해서 별로 활동을 못 했지요.”
“참 요즘 운전 연습도 시작했어요. 원주에 가서 주행연습 두 번 했어요.”
“연습하러 원주까지 가세요?”
“예! 그곳까지 가기에 너무 불편하지만, 이곳에는 믿을만한 전문교습소가 없어요.”
“그럼! 그러지 마시고 주행연습은 여기에서 내 차로 몇 번 하면 될 텐데, 필요하면 그렇게 하세요.”
“아! 아닙니다. 그래서 곧 차를 구매해서 내 차로 직접 연습하는 것이 빠를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절대로 혼자 연습하면 너무 위험합니다. 내가 한두 번 옆에서 봐 드릴 테니 꼭 알려주세요. 차를 고를 때에도 차종이나 색상에 대하여 조언이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그렇게까지 폐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사양하지 마시고 내가 꼭 봐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오늘 그녀와 만남은 그 악몽의 사고로부터 컴프랙스를 딛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정말로 꼭 그녀의 운전 연습을 시켜주고 싶었다. 그는 아내가 신혼 초에 운전 연습을 부탁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는 바람에 아내가 상처받은 사실은 기억하지 못했다.
8월 4일
은지를 만나고 온 후로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예전 같이 아무 일 없었던 양, 물론 일부러 몸 관리 하고 마음도 다스리려 노력한 탓이기도 했다.
사랑을 하고 싶다.
그녀를 사랑하고 싶다 아름답게.
그 사랑은 어떠한 모습일까!
영혼을 녹여 강을 이루고,
취하여 무아의 무지개다리를 건너가
그곳에서 사랑을 하고 싶다.
벅차 견딜 수 없어 심장이 가루가 되고
활활 태워 한 줌의 재도 남지 않은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결국
그녀의 눈이 되어 세상을 보고
그녀의 머리가 되어 생각하고
그녀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이 그녀가 되는
그 사랑을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살고 싶다.
그 사랑을 위해
나는 천상의 사랑이라 하고 남들은 역겨운 불륜이라 하겠지.
그 눈가가 젖어온다.
사건 후 너무 소극적으로 속만 태웠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계속 그녀를 만났더라면 자신이 그렇게 방황하지 않고 활력을 얻어 좀 더 빨리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을 텐데. 내일은 용기를 내어 전화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