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안구도 늙은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책을 읽지 말라고. 절판되어 비싸게 구한 시력 회복책에서는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책 보는 거리 30센티가 눈을 망친다' 의사도 책에서도 경고하는 독서의 위험성. 빈도 수로 치자면, 어쩌면 유일한 취미랄 수도 있는 책 읽기. 그것을 하지 말라니,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건 도서관에서 스치듯 보았던 큰 글자책이었다.
신이 나서 큰 글자책을 검색하고, 도서관 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그러다 또 생각했다. 큰 글씨든 작은 글씨든 근거리에서 무엇을 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뭐가 낫긴 나은 건가? 그래서인지 서너 권을 빌려 읽고는 금세 의욕이 시들어 버렸다. 기분 탓이겠지만 넓어진 지면만큼 집중력이 분산되는 느낌도 들었다. 눈에 좋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 독서는 더 이상 이전만큼 즐겁고 편안한 일이 아니었다.
매일 밤, 책을 읽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에 비어버린 시간. 어느 날 은퇴한 사람이 할 일을 잃어버린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인터넷을 즐기지 않는 아날로그 한 인간이기에 동영상이나 웹서핑에도 흥미가 없었다. (이 역시 30센티 거리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본다는 사실에는 책 읽기와 별반 차이가 없기도 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집에 있는 책을 펼쳤다. 대신 집중하지 않고 10분을 보다, 고개를 들어 저만치 시선을 옮기는 일을 반복했다. 수정체가 두꺼워진 상태로 굳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래 봤자, 시력은 좋아질 수 없다고 말하는 대한민국 의사들이 보면 코웃음 치며 웃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더 나빠지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늦추기라도.
언젠가 도서관 바구니에 들어 있는 큰 글자책 84권을 비워내고, 다시 일반책을 집어 들고 싶다. 시력이 좋아질 그 어느 날이, 내게 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