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 Apr 27. 2024

누구나 입대 전에는 긴장합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단 부딪혀봐야 할 때가 있어요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또 챙길 건 없나 살펴봐."


아침 일찍 가족 모두가 일어나서 가방 하나에 들은 모든 것을 꺼내서 살펴보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우리 집. 그 가방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온몸과 얼굴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경직된 상태임을 나 자신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어쩌다가 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가 하면, 그건 몇 달 전으로 돌아가봐야 한다.




나는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한 대학생이었다. 평일에는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며,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 계발을 하거나 휴식을 가졌다. 주말에는 팀플을 하러 나가거나, 친구들을 만나 놀았다. 정말이지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성적도 꽤나 나쁘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우리 집임에도 성적 차석 장학금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유로 등록금을 내는데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찾아온 한 가지 이슈는 아무 말도 없이 한 통의 연락, 그것도 카카오톡으로 찾아왔다. 평소에는 잘 확인하지도 않던 톡 알람이 유난히 신경 쓰이던 그날, 나에게 '입영판정검사'의 연락이 왔다. 병무청이 고등학생을 마치고 성인 남성이 되어버린 나에게 소집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물론 아무런 각오와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내 주변 친구들이 입대를 결정해서 들어가기도 했고 그들을 보내주는 마지막 모임을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순번이 나에게 벌써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 해당 일자에 맞춰서 입영판정검사를 받으러 향했다. 그곳에 향했을 때 모두의 분위기는 달랐다. 아는 사이인 누군가를 만나 떠들며 검사를 받는 사람도 있었고, 벌써부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이에서 나 역시도 검사를 받았고, 이변 없이... 현역이 떴다. 가장 문제였던 시력도 3급 정도로 판정받게 되었다.


그렇게 현역 판정이 뜨고 어느 날 오전 중에 모든 강의가 마쳤을 때 집으로 향한 나는, 이 시간이 아니면 어차피 늦어지기만 할 뿐이라 생각한 탓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적당한 시기를 골라 지원하기로 단숨에 저질러버렸다. 부모님과 누나마저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 역시도 어떤 근거로 그런 행동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버린 행동, 엎질러버린 물이다. 8월 8일, 나는 한 사단의 신병교육대대에 입대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의 내 생활에는-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하진 않았으나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가족들에게 상황을 전달하자 어머니께서는 상의도 없이 결정한 것에 조금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벌써 그때가 찾아왔다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름의 적절한 판단과 생각 끝에 결정한 것이 오히려 자랑스럽다고 해 주셨고, 누나 역시 동생이 잘 판단한 것일 테니 걱정 말라고 어머니를 달래기 바빴다.

 

친구들은 너도 가는 거냐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나도 곧 가야 한다며 한숨을 쉬기도 하고, 또는 나는 갈 일 없는데 가서 고생하라고 놀리는 분위기도 물론 존재했다. 주변은 주변이고, 무엇보다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은 사실 나 자신이었음이라.


주변에서 괜히 군대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신경이 쓰였고, 나중에 가서는 내 앞에서 왜 굳이 그 얘기를 꺼내냐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도 했다. 가족들의 걱정조차도 짜증 났다. 이미 결정된 사항을 걱정해서 뭐 어쩌란 말인가? 친척들도 나만 보면 군대가 어쩌느니, 입대가 어쩌느니... 아무것도 겪어보지도 않은 나에게 걱정이란 이유 하나로 자신들의 군대썰을 펼치며 듣고 싶지 않은 이런저런 무언가를 내뱉기 시작한다. 그래서일까, 입대 가까이에는 조부모님 댁을 찾아뵙는 것조차 껄끄러웠다.


내 주변의 문제가 될 만한 것들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군 휴학계를 냈고, 알바를 하던 곳도 정리를 했다. 과외를 해 주기로 했던 지인도 (물론 시작도 안 했지만) 못 하게 될 것 같다고 설명했고, 들어가기 전에 해 보고 싶었던 것들을 해 보았다. 친구들과 날을 잡고 여행도 갔다. 나름 길게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도 물론 입대의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좋은 추억을 만들고 좋은 생각만 하다가 즐겁게 놀다 돌아왔다.




그렇게 다시 입대일이 다가왔을 때, 나는 주변의 조언과 이런저런 정보를 바탕으로 짐을 챙겼다. 내가 배정받은 곳은 조금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나가야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거리였다. 길이를 맞춰 밀어버린 머리를 다시 한번 감으며 씻고 정비를 마친 후, 아버지의 차를 타고 우리 가족은 나의 입대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가는 도중의 차 안은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그 전날까지 서로 웃고 울고 떠들며 미리 마음을 다잡아서였을까, 우리 가족은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저 나누며 그곳으로 향했다. 새로운 풍경, 본 적 없는 고속도로.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조금 일찍 주변부에 도착해 가까운 도심으로 나가서 밥을 먹고 카페에 있었다.


그 상황에서 물론 나는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내가 무너지면 가족들 모두가 애써 나를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해 주는 것이 함께 무너져버릴까 두려웠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어떤 누가 가족들과 떨어져 그렇게 길게 생활하는 것에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으랴.




시간이 되어, 우리 가족과 차는 위병소를 통과해 신병교육 대대로 진입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들을 비롯해 여자친구, 친한 친구, 친척까지 모두 동반해서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본인 확인을 마치고 행사가 진행되는 곳으로 향했다. 교육관 안쪽에서 입대해야 하는 대상자들은 중앙의 의자에 앉으라고 안내했고, 나는 가족들과 거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야 했다.


그 당시 엄마는 왠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예상은 했다. 교육관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엄마가 왠지 나에게서 피하려 했고, 누나도 나를 떨어뜨리려 하는 느낌이었다. 감춰왔던, 억눌러왔던 감정이 터진 것이었을 거다. 왠지 나마저도 그 감정이 북받쳐 오를 뻔했지만 더욱 마음을 강하게 먹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사진에 웃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휴대폰으로 내 사진을 스스로 찍어서 가족 톡방에 내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보냈다. 그 당시의 톡이 이 내용이다.




아까도 좀 보고 그랬는데도 좀 마음이 그래서 적어둡니다. 긴 기간 보기 힘들게 되지만 그래도 잘 수료하고 35일 뒤에는 또 볼 수 있으니 그때 건강하게 보는 걸로... 쉽지는 않겠지만 너무 마음 졸이면서 울지 말고 잘 지내주셔요.
폰 받을 때마다 연락 잘할 테니까 그때 연락 잘 받아주시고, 아까 조금 투덜대긴 했지만 다들 같이 와줘서 고맙습니다. 아빠도 긴 시간 운전하느라 수고 많으셨고 누나랑 엄마도 피곤할 텐데 일찍이 같이 다녀줘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수료할 때 썰 많이 풀 테니까 그때 다시 봅시다. 이따 못 볼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미리 남겨둡니다. 다들 아들 잘 기다리고 있어 주셔요. 잘 지내고 그때 봅시다.
사랑합니다.




모두가 입대 전에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가족 누구도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형제자매 중 누가 먼저 가봤다고 해도 누군가를 긴 기간 동안 떠나보낸다는 것에 누가 아무렇지 않겠는가. 이 글을 보고 있을 누군가는 입대를 앞두고 있을 수도 있다. 앞둔 누군가의 가족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평소에 많은 대화를 했다고 해도, 입대 날에는 특히 시간을 가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자.


버틸 수 있다면 견디고 서로의 좋은 모습만 보고 헤어져도 괜찮다.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울어도 괜찮다. 그만큼 서로의 애틋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그것마저도 입대한 이들에게는 가족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내 군생활은, 시작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