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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 May 11. 2024

모든 것이 처음이지만, 그게 뭐 어떻습니까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이겨낼 수 있었던 나날들

훈련소(신교대)에 간 지 2주 차 정도가 되면, 주변의 사람들과 점점 친해지게 된다. 학교에서 입학했을 때의 서먹함이 몇 주 지나면 돈독한 우정으로 탈바꿈되듯, 군대는 특히 같은 생활관의 사람들과 정이 붙게 된다. 오늘 해볼 이야기는, 동기들과의 '정'에 대한 이야기다.




1소대 2 생활관이었던 나는 우리 생활관에 처음 배정받았을 당시 모두가 그러했듯 삭막한 분위기 속에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오라는 대로 왔고, 배정받은 대로 앉아서 대기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누가 먼저 운을 띄우고 얘기를 하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냥 그 장소에서 우리가 훈련병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곳은 얼음장처럼 얼어붙어버릴 뿐이다. 어느 순간 누군가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옆 자리 혹은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끼리 대화를 하게 된다. 학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수준이다. 물론 그조차도 서로에게 상호 존칭어를 써야 한다는 말에 따라서 서로에게 다 존칭을 써서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서로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분위기를 서서히 누그러뜨리기 시작한다.


1주 차에도 서로가 친해지고 말을 트는 경우는 많지만, 내가 굳이 '2주 차'를 언급하는 것은 그쯤 되면 제식도 슬슬 배우게 되고 나름 훈련병으로서 일과 구성에는 적응이 되기 시작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상호 존칭을 쓰라는 이야기를 방송으로도 구두로도 하지만, 그 시기쯤 되면 서로가 몇 살이고 대학이 어딘지와 몇 학년까지 하고 왔는지 등 기본적인 서로의 정보 정도는 대화로 공유했을 것이기 때문에 말을 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분대장(조교) 혹은 소대장 및 그 이상의 간부들이 볼 때는 눈치를 슬슬 보면서 상호존칭어를 사용하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한다.




우리는 특히 서로가 가까워지는 것이 힘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코로나-19는 일상 속에서 점점 잊혀가는 존재긴 했지만, 여전히 유증상자(양성)는 존재했고 그 안에서도 증가세와 감소세를 오갔다. 그 결과 KF-94 마스크를 착용하고 훈련을 받거나 생활관에서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초반에 양성을 받은 한 동기는 격리생활관으로 이동조치되었다. 약 1주 정도를 서로 못 보고 별개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름도 존재도 서로 기억하기 어려웠고, 그 결과 남들보다 사이가 조금 멀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나둘씩 격리생활관에서 분리되었다가 복귀하기를 반복하는 것을 약 3주 차 후반까지 진행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총기제식 훈련주간 양성이 떠서 나는 짐을 모두 챙겨 격리생활관으로 분리되었다.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와서 이제 격리 해제가 얼마 남지 않은 인원들도 있고, 아직 증상이 심해 격리가 연장될 수 있는 인원도 있었다.  사이에서 우리는 또 다른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그도 그럴게, 수많은 인원 중에서 다른 소대 다른 생활관 인원들과 섞여 같은 격리생활관을 사용하다 보니 서로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그곳의 사람들과는 더욱 빠르게 가깝게 될 수 있었다. 이런 곳까지 와서 코로나를 걸려서 억울하다거나 여기서 쉬면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대화밖에 할 수 없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격리 인원에 대해 대부분의 일과는 부여된 게 없으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건강을 회복해 가는 것이 전부였다. 약을 받는 것도 비대면 진료, 밥은 식사추진(도시락을 통해 직접 가져다주는 것)이었고,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닌 이상 점호도 약식이고 건강확인을 위해 비감염된 조교를 자주 보낼 수도 없으니 정기적으로 몇 번 시간을 정해 올라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더욱 동기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격리가 해제될 때 우리는 서로 축하해주며 힘들겠지만 남은 기간동안 같이 힘내보자며 응원해주기도 했다. 서로 보낸 시간이 길어봐야 7일이었던 사람들끼리 말이다.




군대에서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냐 하면 나는 그곳에서의 어려움이라고 답할 것이다. 같은 처지에서 겪는 새로운 것들과 힘들고 어려운 훈련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더욱 뭉쳐 함께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생활관에 비해 우리 생활관은 특히 서로서로 챙겨주고 도와주는 협동심이 발휘된다는 조교들의 평가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서로 모난 성격도 없고 같이 어울리며 대화도 오갔고 부족한 부분은 서로 메꿔주며 도와주었다.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나면 서로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함께 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누구 한 명 빠지지 않고 함께 해냈다. 서로를 점점 더 잘 알게 되었고, 기쁨도 슬픔도 힘듦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후일담으로, 나중에 적을 이야기에 포함될 것이긴 하지만 수료식 이후 자대로 각각 보내질 때 우리는 서로를 보내며 부모님을 보고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과 보냈던 몇 주 간의 시간은 짧으면서도 서로가 가까워지고 의지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렇게까지 각별하게 느낄 수가 있느냐고. 그 답은 나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가 보면 짧을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함께한 그 시간이 누구보다 길게 느껴졌고,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그만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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