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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곰 Oct 09. 2024

대왕고래와 소년

  서점에서 고래를 주제로 한 소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성준이 생각이 났다.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성준이는 대왕고래를 좋아한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면 늘 고래가 그려진 같은 책을 읽는다. 그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지만, 대왕고래를 좋아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대왕고래가 있나 전시를 훑었다. 찾았다. 다양한 크기의 그림이 있었지만, 손바닥만 한 엽서를 골랐다. 몰래 주기에 적당하기 때문이었다. 엽서 앞면에는 대왕고래를 포함한 일곱 종의 고래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만년필을 꺼내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성준아! 대왕고래처럼 너만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길 바란다.”


  다음 날, 쉬는 시간에 성준이를 불러 엽서를 보여줬다. 아이는 보자마자 “와 대왕고래다!”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여러 고래 사이에서 오른손 검지로 정확하게 대왕고래를 짚으며 활짝 웃었다. 성공이다. 내가 쓴 뒷면의 글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교과서 사이에 엽서를 끼워 주었다. 아이는 수업 시간 내내 고래를 들여다봤고, 나는 그런 아이를 라보며 뿌듯했다.


  점심시간에 성준이는 내게 다가오더니 꽃송이를 내밀었다. 능소화였다. 나팔 모양으로 벌어진 주홍빛 꽃잎이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아마 자신이 고래를 좋아하듯 내가 꽃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대왕고래처럼 그중 가장 크고 예쁜 것을 골랐으리라. 그런데 나는 능소화를 보자마자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성준아, 어서 손 씻어!”


  능소화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직업병이 튀어나와 다그치듯 말했다. 성준이가 손을 씻으러 나가자마자 능소화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혹시라도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줄까 봐 걱정해서였다. 성준이는 내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유도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설명해도 아이가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성준이가 하교한 후 능소화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정말 눈이 멀게 되는지 찾아봤다. 그런데 낭설이었다. 그래도 나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고, 우리 사이의 오해를 그냥 내버려 뒀다.


  며칠 후, 성준이가 엽서 한 장과 봉투를 내밀었다. 성준 어머니가 보낸 것이었다.


  “얼마 전에 주신 고래엽서를 성준이가 너무 좋아해 책상에 보물처럼 붙여놨어요. 그리고 성준이가 그린 그림이에요. 감사합니다.”


  봉투 속에는 대왕고래 그림이 들어 있었다. 커다란 대왕고래가 입을 벌린 채로, 작고 다양한 물고기들과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산호와 수초가 일렁이는 바닷물이 별처럼 반짝였다. 내가 준 엽서 속 고래보다 더 아름답고 눈부셨다. 미술 시간마다 성준이 그림에 우리 놀라곤 했다. 피카소와 마티스, 그리고 고흐를 섞어놓은 듯한 선과 색이 독특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려온 성준이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나는 성준이 어머니에게 답장을 보냈다.


  “성준이가 좋아한다니 제가 더 기쁘네요. 성준이의 색감이 놀라워요. 그림도 감사합니다.”


  어머니에게는 긴 글로 감사를 전했지만, 성준이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성준이와 나 사이에는 깊은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성준이는 걸을 때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휘젓고 다녔다. 성준이는 우리 반에서 몸집이 가장 컸다. 그래서 공격적으로 보였다. 그가 누굴 치려는 것 같아 피하면서, 아이들에게도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고래 흉내를 냈던 것 같다. 그 특이한 소리도 고래 울음이었나 보다. 나는 성준이가 자신만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아이도, 그가 준 능소화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가두었다.


  몸길이가 30m에 이르는 대왕고래는 지구상에서 천적이 없을 만큼 가장 크고 힘이 세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고 묵묵하고 조용히 자기의 갈 길을 간다. 성준이도 그렇다. 대왕고래와 성준이에게 상처 주는 것은 자신의 바다만이 전부라고, 그래서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나처럼 편협하고 이기적인 어른들이다.


  다시 서점에 들렀다. 고래가 있던 자리에는 문구류가 놓여있었다. 대신 ‘흰수염고래’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성준이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어쩌면 그 험한 길에 지칠지 몰라

  걸어도 걸어도 더딘 발걸음에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 줘 숨기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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