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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곰 Oct 05. 2024

나의 어른 학생

  눈 쌓인 노량진의 뒷골목을 걸었다. 아니 맴돌았다. 알려준 주소를 찍 지도 앱을 보며 가는데도, 미로같이 좁은 길을 헤매고 나면 도로 제자리였다. 길눈이 밝다고 자부해 왔는데, 안 되겠다. 결국 선교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전봇대 앞에서 기다리는데 남자분이 나를 데리러 왔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그는 엷은 미소를 띠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렇게 카릴을 처음 만났다. 그를 따라 난민센터에 갔다. 그런데 그곳은 내가 아까 지나친 집이었다. 센터라고 해서 당연히 건물로 생각했었는데, 허름한 주택이었다.


  나의 편견과 무지에 뜨끔해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선교사님 댁이자 난민의 임시거처였다. 카릴의 아내인 에나와 그의 딸 에베르타가 공손히 나를 맞이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왔다. 파키스탄을 거쳐 2개월의 긴 여정 끝에 한국에 닿았다. 카릴과 에나 부부는 20대 초반, 에베르타는 19개월이었다. 어린 딸을 안고, 목숨을 건 위험한 탈출을 한 이들에게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우리는 거실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탁자에는 빨간 꽃이 놓여있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러 온 나를 환영하는 의미였다. 교재는 기초단계였다. 하지만 아프간어를 쓰는 제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언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화, 책상, 하늘과 같은 구체명사는 직접 손으로 지시하며 음성과 문자를 알려줬다. 하지만 추상명사는 막연했다. ‘앞’을 알려주려고 내 앞에 있는 에베르타를 가리키니, 에나와 카릴은 갸우뚱하며 서로 아프간어로 대화를 나눴다. 그데 ‘앞’이 아니라 ‘딸’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알려줄 때는 일어나서 손짓, 발짓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내 연기는 서툴렀고, 그들은 옥신각신하며 답을 알아내느라 분주했다. 마치 가족 오락관 같았다. 아니 그보다 심각했다. 서로 정답을 확인하지 못해 찜찜해하며 첫 수업을 마쳤다.


  우리 반에는 버려진 학용품이 넘쳐났다. 쓸만한 것을 골라 매주 아프간 가족을 만나러 갈 때마다 가져갔다. 에베르타에게 줄 간식도 챙겼다. 덕분에 아이와 금세 친해졌다. 내가 젤리를 주면 두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배꼽인사를 했다. 역시 아이들은 새로운 문화에 금방 적응한다. 커다랗고 까만 눈망울에 콧날이 오뚝한 에베르타는 인형 같았다. 낮잠을 자고 나면, 내 무릎에 앉아 부모님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봄에는 현충원으로 소풍도 갔다. 아이는 내 손을 잡고 개미를 보러 다녔다(전 세계 아이들은 모두 개미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에나가 직접 만든 볼라니도 함께 먹었다. 볼라니는 아프가니스탄 음식으로 튀긴 만두와 비슷했다. 얇게 밀어 만든 밀가루 반죽에 다진 감자와 야채를 넣어 빚어낸 후, 기름에 구웠다고 했다. 반달 모양의 볼라니를 처트니에 찍어 먹었는데, 고소한 튀김과 상큼한 소스가 잘 어울렸다.


  의 두 어른 학생은 성실하게 숙제도 잘해왔다. 그래서 몇 달이 지나자 간단한 대화가 가능해졌다. 점심을 먹으며, 아프간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물었다. 카릴은 휴대전화를 꺼내 제복을 입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경찰이었다고 했다. 사진을 보여주는 카릴의 눈빛이 빛났다. 아늑해 보이는 고향 집도 보여줬다. 그런데 이제 불타 없어졌다고 했다. 그는 형과 부모님을 두고 와 걱정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가을이 되자 쌀쌀했다. 겉옷이 필요한 아프간 가족을 위해 집에서 옷을 골랐다. 상표가 붙은 채로 자리만 차지하던 남편의 점퍼가 있었다. 살 빼면 입을 거라고 했지만, 대기 중인 다른 옷도 많았다. 카릴에게 입혀보니 딱 맞았다. 곧 취업하면 입어야겠다며 좋아했다.


  나는 한국어 중에 특히 어려운 게 무엇인지 물었다. 에나는 ‘31일’ 이 어렵다고 했다. ‘삼십일일’로 읽을 때 ‘일’이 연달아 나와 헷갈린다고. 그동안 무심코 읽었었는데, 그녀의 말에 숫자 1과 날짜를 세는 '일'의 발음이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각의 의미를 알려주며, 이 말이 외국인에게 어렵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한국은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6교시까지 공부한다고 하니 카릴과 에나는 놀랐다. 아프간 3교시 수업 후 집으로 간다고 했다(한국 아이들 하교 후에도 학원에 가서 늦게까지 공부한다고 하면 기절할까 봐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프간의 문맹률은 70%가 넘는다. 특히 여성 문맹률은 90%에 달한다. 에나는 학습권을 보장받는 한국의 어린이를 부러워했다.


  다시 겨울이 올 때쯤, 부부는 한국어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카릴은 제조공장에 취직하고, 에나는 둘째를 임신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수업도 끝이 났다. 얼마 전, 에베르타가 어린이집에 잘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말도 잘해서 친구들과 선생님 사이에서도 인기라고 했다. 그리고 에나도 무사히 아들을 낳았다고.


  이들은 나의 학생이었지만, 동시에 스승이었다.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노량진을 향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벅찼다. 그동안 살아온 터전을 잃은 막막한 상황에서도 늘 웃으며 나를 반다. 이들은 살 집도 입을 옷도 없었지만, 염려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동네의 집값이 올랐다는 기사만 봐도 후회고 불안해했다. 난민센터에 주차장이 없다고 불평도 했다.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내가 가르치려고 했던 ‘희망’이라는 추상명사는 바로 이었다. 부디 한국에서 좋은 사장님 만나길, 그리고 평화를 누리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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