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자습 시간에 교감 선생님께 메시지가 왔다. 3반 선생님이 갑자기 결근하게 되어, 1교시 수업을 대신 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수학 교과서를 들고 3반 교실이 있는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 처음 들어가는 다른 반이 낯설었다. 문을 여니 학생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교탁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3반이 예쁘고 잘생긴 데다 수업 태도도 훌륭하다고 소문이 났던데, 직접 보게 돼 영광이네.”
물론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다. 하지만 첫인사로 건넨 하얀 거짓말에 우리 몸에 들어갔던 힘이 풀리고, 웃으면서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뒤돌아 칠판에 글씨를 쓰려는데 보드 마커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앞에 앉은 학생이 냉큼 일어나 찾아줬다. 고맙다고 하면서, 내가 나이가 많아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하니 몇몇이 외쳤다.
“선생님 20대 같아요!”
당연히 그렇게 보일 리 없다. 나의 20대는 나도 가물가물하다. 누가 들었을까 봐 복도 창문이 열렸나 살펴봤다. 이 정도면 하얀 거짓말이 아니라 새빨간 거짓말에 가깝다. 하지만 내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갔다. 아이들의 수준 높은 사회성을 칭찬하며 진도를 빨리 마쳤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 기분 좋게 놀이를 했다.
쉬는 시간에 우리 반으로 돌아오니 그새 난장판이었다. 제일 소리 지르며 뛰고 있는 녀석부터 불렀다. 자랑스러운 2학기 회장이었다. 손꼽히는 개구쟁이가 임원이 돼 걱정이었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준우야, 준우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서 인기도 많잖아. 그래서 회장이 됐고. 그런데 영향력이 커지면 책임도 커져. 아까처럼 선생님이 자리에 없으면, 회장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선생님이 준우 좋아하는 것 알지? 우리 준우 믿는다.” 나는 준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아이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부터 급식실 갈 때 문단속을 부탁해.” 나는 준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후, 준우는 아이들이 모두 나가길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오며 문을 잠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에게 엄지를 추켜올렸다. 점점 회장다운 모습을 보이는 준우를 보며 아들의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부른 적이 있었다. 교사로서 숱하게 상담을 해왔지만, 학부모로서는 처음이라 긴장이 됐었다. 담임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씀하셨다. 아이가 수업 시간에 딴짓을 자주 하고, 모둠활동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교사인 내 아들이 학교에서 문제 행동을 보였다니 부끄럽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지만, 교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고 뒤통수가 얼얼했었다.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내 행동부터 찬찬히 되짚어봤다. 오빠라고 동생에 비해 엄격하게 대했던 내 모습이 보였다. 나부터 변해야 했다. 아들도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 너그럽게 대하기로 다짐하며 집으로 갔다. 상담 내용을 궁금해하는 아이에게는 선생님이 칭찬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수업에 조금만 더 집중하고, 친구에게 물건도 빌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를 오래 안아 주었다. 그렇게 내 태도가 바뀌니 아이도 달라졌고, 이후 선생님들께는 다행히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1년 만의 고백이었다. 아이는 그런 일이 있었냐며 놀랐다. 그리고 그때 거짓말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교육심리학에서 무언가에 대한 사람의 믿음, 기대, 예측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한다. 하버드대학교의 교육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Robert Rosenthal)은 무작위로 뽑은 학생 명단을 담임 선생님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이 학생들은 지능이 뛰어나 앞으로 성적이 향상될 것이라고 거짓말했다. 그런데 8개월 후 이들의 성적은 실제로 향상되었다. 교사의 긍정적인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려는 학생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하얀 거짓말의 효과를 입증한 실험인 것이다.
하얀 거짓말은 남을 위해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예쁘다고 말하면 예뻐 보인다. 믿는다고 말하면 믿어진다. 우리는 기분이 좋으면 웃지만, 우리의 뇌는 웃으면 기분이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뇌과학자는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말도 그렇다. 거짓말일지라도 내가 뱉은 말은 그렇게 여겨진다.
새빨간 거짓말로 어둡게 물든 세상을 환한 핑크빛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하얀 거짓말이다.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거짓말쟁이와 구분해 하얀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을 ‘거짓말둥이’라 부르고 싶다. 귀염둥이, 재간둥이에 쓰이는 접미사 ‘-둥이’를 붙인 것이다. 순수한 ‘거짓말둥이’가 많아질수록 세상은 유쾌하고 밝아질 것이다.
‘거짓말둥이’로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이제 그만 쓰고 자야겠다. 내일 즐거운 출근이 기다리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