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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

by 철부지곰 Mar 02. 2025

  사랑하는 아들아,

  어제 너를 들여보내고, 집에 오니 1시쯤이더구나. 밥 생각도 없어서 침대에 한참을 누워있었어. 텅 빈 네 방을 보니 눈물도 나더라. 어젯밤까지도 같이 짐 싸면서 잔소리했었는데, 다 후회가 됐어. 족은 보면 화나고, 떨어지면 안타깝고 그런가 봐.


  4시가 다 돼서야 늦은 점심을 먹고, 운동하러 갔어. 머릿속이 복잡하고, 속이 시끄러울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지. 근력 운동할 때 한 단계 올리기가 힘들었지만, 공부라는 근력을 키우는 너를 생각하며 버텼어. 땀 흘리고, 사우나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더라.


  집에 와서 네가 좋아하는 지드래곤의 예능 프로 ‘굿데이’를 봤어. 엄마 TV 잘 안 보잖아. 그런데 하필 입소하는 날에 첫 방송 한다며 아쉬워하던 아들을 대신해 본방 사수했지. 네가 궁금해할 테니, 간단히 얘기해 줄게.


  지드래곤은 가수가 되기 전부터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과 노래를 만들고 싶었대. 그래서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지. 그는 정형돈, 데프콘, 코드 쿤스트 등 친분이 있는 여러 연예인을 만나며 자기 뜻을 전했어. 활동을 쉰 7년 동안, 다도(茶道)와 명상도 하며 지냈대. 프로그램이 길다고 느껴질 즈음, 잘생긴 배우 김수현이 나온 덕분에 끝까지 집중할 수 있었어. 예고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배우 정해인도 나오더라. 다음 주에도 봐야겠어.


  시청률은 4.9%로 일요일 전체 1위를 차지했어. 역시 지디! 아들을 위해 댓글도 찾아봤는데, 평도 좋았어. 분당 최고 시청률은 6.2%로 예고 장면이었어. 앞으로 전망이 밝네! 프로그램 끝나니 11시더라. 이제 너도 배정받은 방에 들어갔겠구나, 싶었어. 낯선 환경에서 첫날밤은 잘 잤는지, 코골이가 심한 이웃은 없는지 궁금해하며 엄마도 네가 없는 첫잠을 청했지.


  네가 첫날 잘 일어났을까, 걱정하며 잠에서 깼어. 그런데 아침 7시에 카드로 8,000원을 썼더구나. 밥도 다 주는데 매점에서 뭘 샀을까, 의아했지만 잘 일어난 증거가 반가웠어.


  시간이 약이라더니 오늘은 네 방을 정리할 힘이 나더라. 베갯잇과 외투 몇 벌을 빨았어. 혹시 주머니에 돈이 있지는 않나 모조리 뒤져봤는데, 깨끗하더라. 목깃과 소매의 찌든 때를 비벼 과탄산소다에 담가놓고, 책상 정리를 했어. 그리고 세탁기를 돌리고 산책하러 갔지.


  모자에 장갑까지 챙겼는데도 아직은 쌀쌀하고 춥더라. 네가 따듯한 기숙사에서 공부하길 잘했다, 고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031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 스팸전화 같아서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받았는데 네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어.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어. 그런데 넌 카드 잔액이 부족하니 돈을 넣어달라는 용건만 남기고 전화를 끊더라. 그래, 잘 있으니 됐다.


  집에 와서 네가 수능 볼 때 응원의 선물을 보내주셨던 분들에게 네 소식을 전했어. 뜻을 이루기 위해 다시 도전한다고. 덕분에 건강하고 희망차게 재수 기숙학원에 입소했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지. 모두 너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칭찬하셨어. 그리고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셨어. 힘내라고 천혜향도 받았는데, 엄마가 대신 잘 먹을게.


  아들아, 지금은 헤매는 것 같아도 희망이 있다면 길을 잃는 것은 아니란다. 책 읽다가 네게 보내고 싶은 시가 있어 적어볼게.     


금이라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J.R.R. 톨킨     


금이라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헤매는 자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오래되었어도 강한 것은 시들지 않고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못한다.

타버린 재에서 새로이 불길이 일고,

어두운 그림자에서 빛이 솟구칠 것이다.

부러진 칼날은 온전해질 것이며

왕관을 잃은 자 다시 왕이 되리.     


  옥스퍼드 영문학 교수이자 <반지의 제왕>을 집필한 J.R.R. 톨킨의 시란다. 그는 <반지의 제왕>의 집필을 시작한 지 16년 만에 첫 책을 출판했어. 그 당시 그는 60세가 넘었으니 오랜 시간 헤맨 것이 분명하지.


  기다리던 출판을 앞두고 그는 친구인 로버트 머레이 신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어.     


  “출판이 두렵소. 어떻게 썼는지 기억도 안 나. 마음을 열고 비판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소.”     


  두렵고 어두운 시간을 거쳐, 그는 결국 시들지 않는 빛이 되었지. 아들이 길을 잃지 않고, 깊이 뿌리내려 마침내 빛나길 바라고 응원한다.      


                                                   2025년 2월 18일 화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책상 정리하다가 굴러다니는 별다방 쿠폰을 찾았어. 혹시나 해서 등록해 보니 만 원이 들어 있네ㅎㅎ 엄마를 위한 깜짝 선물로 알고 잘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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