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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재수라는 시작

by 철부지곰 Feb 23. 2025

  “죄송해요. 재수할게요.”


  수능을 보고 온 아들의 첫마디였다. 외식을 기다리던 딸은 오빠의 말에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시험을 못 봤고, 영어는 1점 차이로 등급이 내려갔다고 했다. 녀석은 배도 안 고프고, 아무 의욕이 없다고 했다. 괜찮다고, 너와 같은 수험생은 전국에 많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엄마의 말이 자신에게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침의 기대가 무너지는, 긴 저녁이었다.


  아들은 정시러였다. 치열한 내신 경쟁에서 뒤처지자, 고2 때부터 수능에 올인했다. 그래도 모의고사 점수는 곧 잘 나왔다. 그런데 수능 결과는 달랐다. 나도 수능을 망했었다(솔직히 녀석이 나보다는 덜 망했다). 원래 수능은 모의고사보다 낮게 나오고, 그렇다고 네 실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아들은 확고했다. 그러면서 기숙학원에 가겠다고 했다.


  “네가 원한다면 존중해. 그런데 엄마가 허락하는 이유는 네가 다음 수능을 잘 보길 기대해서가 아니야. 물론 양심껏,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결과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니까. 엄마는 재수하는 그 시간이 네 인생에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의하는 거야. 시험에는 실패가 있지만, 인생에는 실패가 없거든. 시험은 우릴 속이기도 하지만, 시간은 정직하기 때문이지.”


  그렇게 아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험표를 받은 날부터 예비 재수생이 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 기숙학원에 입소했다. 2025학년도 수능 응시자는 총 46만 명 정도였다. 놀라운 것은 재학생이 약 30만 명, 소위 N수생이 약 16만 명이라는 점이다. 졸업생이 고3 수험생의 절반을 넘었으니, 학생의 절반 정도는 재수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엄청난 숫자다. 내가 수능을 볼 때는 약 70만 명이 응시했었다. 앞으로 학생이 줄어 대학 가기 쉬워질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더 치열해졌다.

 

  정해진 수의 자리를 두고 수많은 학생이 경쟁하는 게 안타깝다. 막대한 비용과 에너지도 아깝다. 하지만 자신의 진로를 위해 도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재수 없는(?) 인생이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느냐. 재수생 엄마로서는 아이의 결정을 지지하고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아들은 기숙학원에서 속세와 단절된 채 살기로 했다. 휴대폰과 학습용이 아닌 인터넷도 금지이다. 오로지 부모가 보내는 편지만이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다. 재수생인지 죄수생인지 모를 환경인 것이다. 그 덕분에 아들은 나의 편지를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집에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기숙학원에 입소하는 날, 아들은 차 안에서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깊은 한숨을 거푸 쉬었다. 앞으로 음악도 못 들을 텐데, 듣고 싶은 노래를 녀석에게 골라보라고 했다. 잠시 후, 차 안 가득 영화 코코의 OST ‘Remember Me’가 울려 퍼졌다. 구슬픈 가락에 가사는 이러했다.      


  “기억해 줘. 지금 떠나가지만 기억해 줘. 제발 혼자 울지 마. 몸은 저 멀리 있어도 내 맘은 네 곁에”   

   

  자신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선곡에 웃음이 터졌지만, 이내 눈물이 났다. 아들은 훌쩍이는 내 어깨를 말없이 어루만졌다.

    


  녀석은 자기가 없는 동안, 각자 일상을 잘 보내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재수생 엄마라는 특별한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편지기록하기로 했다. 아들에게 보내는 엄마의 편지가 다른 재수생과 그 가족에게, 그리고 각자의 인생에서 나름의 시험에 도전하는 모든 분께 응원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아직 수능을 치르지 않은 학생이라면, 이 글을 타산지석 삼아 늦기 전에 정신 차리길 바란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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