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에필로그

수능 그 후

by 철부지곰

드디어 수능이다. 기숙학원의 재수생에게 수능일은 곧 퇴소일이다. 학생들이 시험을 보러 가면, 그 사이 학부모는 짐을 싸야 한다. 그리고 고사장에서 아이를 만나 집으로 데리고 오면, 긴 수험 생활은 끝이 난다.

일을 마치고 경기도 이천으로 향했다. 아이가 잘 잤는지, 컨디션은 어떤지 궁금했지만, 휴대전화를 학원에 제출해서 알 길이 없었다. 아침 6시 반쯤 2,500원을 결제했다는 알림 문자를 보며 짐작할 뿐이었다.

‘아메리카노를 샀나 보네. 늦지 않게 잘 일어나서 다행이네.’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있으라고 아들이 당부했지만, 학원이 가까워지면서 긴장됐다. 그런데 큰 도로에서 좁은 길로 접어들자 도로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조용한 시골에 수백 대의 차량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오가는 길이 꽉 막혀 버린 것이었다. 진입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주차하고 방을 찾아 들어갔다. 예상대로 녀석은 몸만 빠져나갔고, 물건은 널브러져 있었다.


시험에 대한 낭만적인 걱정은 집어치우고, 어서 치워야 했다. 창문을 열고 이불과 패드를 털었다. 자질구레한 짐은 캐리어에 몽땅 넣었다. 책은 모조리 상자에 담았다. 축구화만 서너 켤레가 나왔다. 냉장고에 남은 음료수를 마시며 쓰레기를 버렸다.

독서실에 가니 수백 개의 책상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아이 자리에 가보니 책이 정말 많았다. 모두 쌓으면 내 키를 훌쩍 넘을 정도여서 도저히 가져갈 수가 없었다. 이 많은 것을 보긴 한 건가, 싶어 슬쩍 넘겨보니 공부한 흔적이 있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을지, 그동안의 노력이 느껴졌다. 매일 기록한 공부 일지도 있었다. 날마다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 것에는 사선이 쳐져 있었다. 모의고사를 본 날엔 과목별 자신의 문제점과 앞으로 노력할 점이 쓰여 있었다. 이 공책은 버리면 안 될 것 같아 따로 챙겨놓았다.


카트에 책을 잔뜩 담아 버리고 또 버렸다. 수거장에는 수영장만 한 부대가 있었는데, 금세 가득 찼다. 우리도 열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며 사물함과 서랍까지 모두 비웠다. 학생들의 온 청춘을 쏟은 문제집과 교재는 하루 만에 쓰레기가 되었다. 그걸 사 주느라 온 에너지를 쏟아온 부모는 버리는 것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엄청난 자원 낭비에 씁쓸해졌다.


두 시간 만에 짐을 다 싸서 고사장으로 떠났다. 네 시쯤에 도착했는데 이미 양옆 도로는 차로 가득했다. 어차피 기다려야 하니 국밥을 먹으러 갔다. 내 속을 든든하게 채워야 아이가 어떤 상태이든 넉넉하게 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뜨끈한 국물을 먹으니, 아침부터 얼어있던 마음이 말랑해졌다.

저녁 6시가 넘어 어둑해진 뒤에야 아이를 만났다. 언덕을 내려오는 아들의 얼굴을 밝아 보였다. 그런데 내가 안아주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흠뻑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우선 차에 탔다. 한참을 울고 나더니, 오늘 하루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간밤에 두 시간밖에 못 자서 피곤했지만, 자기 암시를 위해 친구들에겐 푹 잤다고 거짓말했다고 했다. 그렇게 고사장에 들어갔는데 자기 책상만 훌쩍 높아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눕혀서 나사를 빼고 조절했다고. 그러느라 국어 예열 지문도 못 봤지만, 덕분에 잠에서 깼다고 세뇌했다고 했다. 감독관에게 교체해 달라고 하지 그랬냐고 했지만, 그 생각은 못 했다고 했다. 책상과 씨름하느라 진을 빼서 가뜩이나 어려웠던 국어 점수가 아쉽다고 했다.


가장 자신 있는 수학 시간에는 14번에서 꼬였다고. 쉬운 문제인데 막혀서 40분을 허비했다고 했다. 정말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이 힘든 것을 또 할 수는 없어서 남은 20분 동안 미친 듯이 풀었다고 했다. 끝나고도 손이 너무 떨려서 도시락도 거의 못 먹었다고. 밥도 못 먹고 그 오랜 시간을 끝까지 버텨준 녀석이 대견했다.

간식이라도 먹으라고 하니 토할 것 같아서 아무것도 못 먹겠다고 했다. 그리고 시험지를 다시 풀면서 답을 맞혔다. 아이는 한숨을 몇 번 쉬더니, 평소보다 낮은 점수에 아쉬워했다. 이렇게 골고루 못 볼 줄은 몰랐다고.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의 컨디션이 결정적인 수능은 자기랑 맞지 않는다며, 곧 사라질 입시 제도라고 저주 섞인 예언을 남겼다.


올해 꾸준히 좋은 성적이 나왔기에 기대했던 나도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최선을 다하고 끝까지 완주했기에 넌 이미 목표를 이루었어. 시험은 우릴 속이지만, 실력은 우릴 배신하지 않아. 올해 엄마는 네 실력에 놀랐어. 그리고 오늘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스스로 버틴 이 경험은 절대 헛되지 않아. 성숙한 모습을 칭찬해 주고 싶어. 괜찮아. 정말 수고했어.”


울먹이던 아들은 점차 진정했다. 불운했던 오늘이었지만, 감사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잠을 못 자 아침에 카페인이 간절했는데, 매점이 문을 닫는 중이었다고 했다. 늦었지만 아메리카노를 살 수 있는지 여쭈었는데, 받아주셔서 정말 안도했다고.


녀석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오늘이 참 이상하다고 했다. 일 년간 함께 지낸 친구들과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갑자기 다른 세계로 온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했다. 녀석은 소고기를 먹고 나서야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자기가 매일 열심히 공부한 증거를 동생에게 보여주겠다며 공책이 어디 있냐고 내게 물었다. 챙겨둔 노트를 건네주며, 책이 너무 많아서 나머지는 다 버렸다고 했다. 아들은 자기가 이미 반은 버린 것이라고 했다.


공책을 주욱 넘기다가 그림이 보였다. 동생은 너무 못 그렸다고 비웃었다. 목이 칭칭 감겨있고, 팔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답답한 자신의 처지를 투사한 듯 표정이 슬퍼 보였다.

어느 날은 따뜻한 집에서 가족과 즐겁게 지내는 꿈을 꿨다고 했다. 그런데 깨고 나니 현실의 기숙사가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고. 그날은 유독 엄마가 보고 싶어서 샤워하면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리움을 담아 직접 지은 시를 읽어 주었다. 노트 맨 뒤에 적은 수십 개의 노래 제목은 뭐냐고 물었다. 듣고 싶은 노래가 떠오를 때마다, 수능 끝나면 들으려고 적어둔 것이라고 했다.


보고 싶은 가족도 못 보고, 듣고 싶은 노래도 참아가며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겹게 달려온 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르면 좋겠지만, 아들의 말처럼 인생은 쉽지 않다. 하지만 고생한 만큼 어른이 되었고, 그런 어른의 인생은 살만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수능 다음 날, 아이들을 두고 나는 출근했다.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식사 준비도 못 해 놓은 채 부랴부랴 나왔다. 오전 11시쯤, 아들이 걱정돼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대신 딸에게 전화했다.


“잘 잤니? 오빠는?”

“자고 있어.”

“아침은?”

“계란말이 해서 먹었어.”

“잘했네. 오빠는?”

“오빠 것도 해 놨지.”


그동안 고생한 수험생 모두 가족의 사랑을 든든하게 먹고, 다시 힘내길 바란다. 그리고 수능은 망해도 인생은 망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명심하길 바란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3화수능 D-1 엄마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