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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연지기 Apr 03. 2024

낙화와 화백 그리고 권태

칼날이 공기마저 가를듯 날카롭고 섬세하다.

-낙화와 화백 그리고 권태-

칼날이 공기마저 가를듯 날카롭고 섬세하다.
신은, 나에게 미운털을 박아놓은듯 싶은것이요
지은 죄를 하늘에서 지켜보시나이다.
가라사데–
애통하는자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것임이요.
아멘–
..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아멘–
..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아멘–
..
필요 없다.
필요 없어질 무렵이다.
평범한 삶을 살아 권태로워,
사는것이 권태롭고.
평범한 일을 하여 권태로워,
사는것이 권태롭고.
평범한 세상 살아도 권태로워,
사는것이 권태롭고.
평범한 사랑 하여도 권태로워,
사는것이 권태롭고.
평범한 인연 생겨도 권태로워,
사는것이 권태롭고.
평범한 거리 걸어도 권태로워,
사는것이 권태롭고.
평범한 자살 생각에 권태로워,
죽는것이 권태롭다.
..
나, 누군가에겐 정말 특별한 사람 아니겠는가?
세번을 수렁에 빠진 나를 건져 올려주셨사오나
이래 미운털을 박아놓은걸 보아하니
다시 수렁에 밀어넣는 꼴이란 말이오.
나는 신성을 져버린 '이단' 일세
트리니티 포스를 뒤집어버린
역 삼각형의 무한한 패턴은 그만, 꼬여버리고 말았소.
신앙심을 등지고 말았다는 뜻이요.
믿었던 예술의 삶은
내게있어 절망적인 권태였고
믿었던 예수님 그는
내게있어 희망끝에 절망이요

성부–
아버지, 저는 벼랑끝에 서있었습니다.
저를 다독여 절벽에서 끌어내려주셨던 그날이,
제게는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시렵니까?

성자–
아버지, 저를 다독여 끌어내려주셨던 그날,
제 마음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시렵니까.
저는 벼랑 끝까지 가있었단 말입니다.

성령–
아버지, 제가 얼마나 서운했는지는 아시렵니까
저는 벼랑끝에 서있었습니다.
저를 도랑으로 끌어내렸던 그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저를 놓아주심에,
저는 이해 하기를 포기했습니다.
저는 살아 가기를 포기했습니다.
저는 사람 이기를 포기했습니다.
저는 인간 이기에 포기했습니다.
백전불태– 百戰不殆
함에, 의인은 백-한번 일어나여
일어나는것에 권태스러웠고
지피지기– 知彼知己
나와 외의 것들을 다시금 알고나니
더 할 나위 없이 권태스러웠네.
때로는 모르는게 나은것도 있는 법이였단 말이오.

나는 이해 하기를 포기함에
의인이 일곱번 넘어져 다시 여덟 아홉 일어나고서
또 다시 넘어지길 반복하오니
의인은 재앙으로 인해 엎드러진
악인이 아닌지 나는 의구심을 품었소
무간지옥– 無間地獄
쉴틈 없이 끊어짐이 없고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운명 이라면
과연 엎드러진 악인은 악인이라 말 할수 있겠소?
과연 일어나야만 하는 의인은 의인이 맞소?
벌을 받는것이요.
함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구원 으로부터
엎드려 절을 받아낸 의인을 악인이라 말 할수 있겠소?
성자, 악인에 의해 엎드려진 의인은
악인이 의인을 넘어뜨린것이오?
의인이 악인을 위해 넘어진 것이오?
나는 끝내 이해 할수가 없네
때문에, 권태롭소.
나는 끝을 모를 고통 받는 죄인이요.
때문에 권태롭소.
나는 끝에 결말이 정해진 의인이요.
때문에 권태롭소.
나는 끝에 결말이 정해진 악인이요.
때문에 권태롭소.

죄악이 순환되는 괴로운 파멸적 삶은,
스스로 숨통을 끝맺기에는 아름다운 결말이로다.

붉은 피가 가슴팍으로 흘러내려 가지처럼 번져 흘러
소나무의 모습을 띄우네.
그 가지에 꽃이 피워지며
'Swallow' 한마리 앉아 쉬어가오
동시에 포식자가 나타남에
한입에 목구멍으로 제비가 넘어가오
아름답다.
아름다워
한몸 불살라 처형대 혹 십자가에 걸린
의인일세

하물며

마지막이라니.
두려워 말길.
아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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