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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아오라 Feb 24. 2024

두근, 두근! 뉴질랜드 첫 등교!

어리둥절한 딸과 함께 하는 등교 첫날!

오늘 처음 학교를 가는 날이다! 두둥! 그날이 왔어요! 

8살 7월에 처음 뉴질랜드에 왔다. 처음은 단기 스쿨링 8주를 신청하고 이곳에 왔다. 이곳을 남편도 함께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기 때문이다. 언젠가 결혼 초에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가 아이가 생기면 언젠가 한 번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해보자." 그런데. 내가 아프면서 뜻하지 않게 남편은 2년 넘는 시간을 반강제 주부로 생활을 했다. 병원에 있을 때 남편은 종종 젖병을 씻느라 주부 습진이 걸렸고, 손이 나처럼 거칠어졌으며, 손등이 트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그런 메시지를 받을 때면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주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군, 내가 남편을 새롭게 태어나게 했군. 훗훗. 하며 웃을 때가 더 많았다.

사실 우리 남편은 대한민국 모든 엄마들이 원하는 공부 잘하고 속 썩이지 않고 의대도 터억 합격해 대한민국 의사가 되어 주고 엄마가 소개팅 가라고 하니까 군말 않고 소개팅 자리에 나가주고, 소개팅을 하자마자 결혼 날짜와 장소를 통보하고 그 여자하고 식장에 손잡고 들어가는데 만난지 3개월도 안 걸리고. 손흥민을 능가할 정도의 결정력과 추진력이 있는 남자다. 나의 남편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자식인거다. 그래서 어머니에겐 자랑스러운 의사 아덜인 나의 남편은 설거지, 청소를 비롯한 간단한 밥 하기(라면 끓이기, 계란프라이, 고구마, 감자 삶기 포함) 기타 모든 집안일은 해본 적도 시켜본 적도 없는 그런 사랑둥이 어화둥둥 세상 소중한 의사 아들이다. 

먼저, 내가 진단받기 몇 개월 전에 엄마는 유방암 0기로 수술을 하셨는데, 40대 초반 이른 나이에 자궁 적출 수술을 받으셨다. 그 후 몸 오랜 시간 엄마의 몸은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그 후 60대에 유방암 0기 진단을 받으셨다. 수술은 아주 간단했으나 엄마는 계속 유방 통증이 있으셔서 치료를 받는 상황이라 아기를 업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남편이 주로 포대기를 했다. 어쨌든 어머니의 의사 아들이 집에서 포대기에 어린 자식을 둘러메고 젖병을 씻고 장모님과 장인어른과 함께 한 집에서  복닥복닥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님이 아셨다면 기분이 몹시 나쁘셨을 거다. 하지만 시댁식구 누구도 내가 투병생활 하는 동안 연락도 만난 적도 없으니 불행 중 다행이지 싶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나의 딸은 5세와 6세 때 영어 유치원을 다니고 7세에 일반 유치원으로 옮겨 졸업한 후,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보통은 유치원을 중간에 옮기는 일은 드물다. 몇 가지 큰 이유가 있었으나  옮긴 이유를 짧게 설명하면 교우 관계였다. 초등학교 들어가서 친구 사귀고 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학교에 입학하면 유치원때 친구들이 있어 학교 적응이 쉽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그래서 고민 끝에 일반 유치원으로 옮겼고 잘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나의 딸을 일반 유치원으로 옮기길 정말 잘 했단 생각을 한다. 나의 딸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엄마. 엄마는 나빠. 영어 유치원에서 수업 듣고 외우는게 얼마나 어려 운 일인 줄 알아? 나는 아직 아기야. 영어 유치원은 너무 힘들었어. 그런데 지금은 너무 좋아. 지금이라도 여기 유치원으로 보내줘서 고마워 엄마." 이 말에 모든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딸의 생각과 마음이. 유치원때는 학습을 하는 때가 아닌 마음과 생각 주머니를 키워야 하는 때였단 것을.  맙소사! 나는 그 중요한 시기를 1년 남짓 남았을때 깨닫고 말았으니, 어리석은 엄마의 선택에 나의 딸은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는 영어유치원이 좋은 유치원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머리를 쥐어 뜯는 곳이 었을 테니 장점과 단점을 쓰고 싶진 않다. 유치원은 학습 위주로 되어서는 안되고 아이의 기질에 맞게 가는 것이 맞는 선택이다. 어쨌든 영어 유치원을 통해 영어를 접하긴 했으나, 엄청난 효과가 있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었고, 하루종일 텍스트 외우기를 통해 문장은 외워서 말을 하나 뒤돌아 서면 까먹고, 간단한 회화와 파닉스가 가능한 정도였다. 영어 유치원을 다닌 경험 외에는 영어 학원, 영어 방과 후 수업은 다닌 적이 없다. 오직 영어 유치원 2년 경험이 전부이다. 

타우랑가에 있는 학교는 8시 10분에 교실 문이 열린다. 그전에 와서 학교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된다. 첫날 등교하는데 남자 선생님 두 분이 학교 정문에서 "Goodmorning"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아이들이 차에서 내릴 수 있게 차문을 열어 주고 계셨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피스에서 학교 생활에 필요한 교복, 북백, 모자를 구매하여 오피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교복을 입은 딸의 눈빛에서 긴장과 설렘이 교차되는 것 같았다. 교복으로 갈아입고 우리는 유학원 원장님, 유학생 담당 선생님과 함께 year2 room30로 곧장 갔다. 

한국은 군대식 책상 배열이라면 이곳은 둥근 모양의 책상과 네모 모양의 책상이 있고 모둠으로 앉게 되어 있다.  한국처럼 지정 자리는 없다. 그냥 와서 빈 곳에 앉으면 된다. 한국처럼 아이들이 만들거나 그린 것들이 교실 벽에 붙어 있다. 교실이 개방되어 있고, 학부모 누구나 언제든 들어와 아이가 수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이 한국 학교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한국은 교문 통과는 자유로우나 학교 건물 자체 출입은 어렵다. 한국 부모가 원한다면 들어는 갈 수 있지만 우리는 안다. 암묵적인 그 약속들을 말이다. 

- 함부로 들어가지않기! 

- 들어가서 복도 창문 너머로 내 아이의 교실을 보지 않기!

- 빼먹은 준비물이 있다면 얼른 그것만 주고 나오기! 

이것이 한국인 엄마들이 지켜야 하는 학교와의 암묵적인 약속이다.

반대로 뉴질랜드는 아이들이 수업받는 교실에 들어갈 수 있다. 등교할 때 아이와 함께 교실에 와서 아이가 자신의 책가방을 거는 동안 학부모는 선생님과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너무 다른 시스템에 눈이 뜨이고 코가 커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개방적이라니. 따로 교재는 없으나 선생님이 주는 페이퍼로 수업을 한다. 교재가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믿고 보내야지! 한국인 엄마 마인드로는 교재가 없으면 어떻게 진도를 나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곳은 뉴질랜드니까. 한번 해 보는 거지 뭐.

그렇게 처음 선생님과 긴장한 채로 나의 딸은 수줍게 "Hi"를 말했다. 나이가 있으신 선생님이었고, 반갑게 맞아 주셨다. 나의 딸에게 천천히 말씀을 해주시니 얼었던 마음이 조금은 녹는 듯했다. 나의 딸은 긴장한 탓인지, 영어를 까먹은 탓인지 "What's your name?"을 첫날은 알아듣지 못했다. 선생님이 교실에 있던 여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화장실이 어디인지 한국인 친구에게 알려 주고 오라고 하셨다. 이름 모를 금발 머리의 친구와 어색하게 화장실 찾기를 하고 돌아오는 딸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화장실 안내를 도와준 금발 머리 친구의 눈빛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저 아이도 낯선 아시안 친구라 긴장하는 거겠지 싶었다.

"수업 잘 듣고 2시 30분에 만나자." 

딸과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딸의 눈빛이 사뭇 비장했다.

아무래도 첫날이라 긴장한 딸의 모습이 걱정이 되어 남편과 함께 점심시간에 학교로 향했다. 12시부터 점심 심시간이고 12시 15분쯤에 아이들이 밖으로 나온다고 들었다.  밖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12시 15분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나의 딸을 찾기 위해 두 눈을 빠르게 움직였다.

교실 올라가는 건물 앞에 위치한 로켓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딸을 발견했다. 그리고 살짝 들어가 선생님께 허락을 구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얼마나 노는데 집중을 했는지 엄마, 아빠가 왔다 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이날 하교 후 만난 딸은 잔뜩 신난 채로 뛰어나오며 자랑스럽게 

"엄마. 나 오늘 Hi, Thank you. 두세 번 말했어. 큰소리로는 못했어. 친구들이 이름 물어본 것 같은데 내가 작게 말해서 못 알아들은 것 같아. 그런데 학교는 재밌었어. 내일 또 갈래."

라고 말하는 딸의 모습에서 대충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기분 상하는일은 없었던 것이다.  나와 남편은 이름 모를 행성에 떨어져 낯선 곳을 탐험한 후 집으로 무사 귀환 한 딸의 밝은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앞으로 나의 딸이 생활하게 될 뉴질랜드의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한국과 얼마나 다를까. 걱정반 기대반 설렘반의 첫날이 끝났다.

이제 시작이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 알아가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한 가지 큰 차이점은 한국과는 다른 시스템이란 것이다. 한국보다는 덜 폐쇄적이다 느꼈다. 담임 선생님과의 대화도 언제든 할 수 있고, 아이의 학습 상태라던지, 오늘의 컨디션 같은 것들도 이야기할 수 있다. 앞으로 선생님과의 대화는 영어로 해야 한다는 막중한 압박이 있다. 그렇지만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엄마가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나의 딸도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영어 그까이꺼! 차근 차근 하면 되지!

떠나고 싶다 해서 다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겠노라 이야기하는 나와 남편이 떠남을 준비했고, 떠나왔다. 언제든 떠나겠다 생각이 들면 짐을 싸는 부모의 실행력을 보며 나의 딸은 무엇을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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