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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16. 2024

잘하면 잘하는 대로

  시험은 잘 봤니?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뭐부터 듣고 싶어?


  엄마야 무조건 좋은 소식이지.


  일단, 수학 백, 국어 백, 영어는 하나 틀렸어.


  하나는 어떤 문제였는데?


  아이, 정말 엄마는 지금 그게 궁금해!


  아, 그래 그건 나중에. 나쁜 소식은?


  과학이랑 기술가정은 완전 망했어. 


  몇 점인데? 


  음, 서술형 때문에 정확하진 않지만 엄청 못친 것 같아. 


  도대체 얼마나 못 쳤길래. 다른 아이들은?


  애들도 망했다고 난리야.


  그런 말 믿고 안심하다가 나중에 실망한다. 어쨌거나 시험 치르느라 수고 많았어. 자세한 건 집에서 얘기하자.


  궁금해할 걸 아는지 시험이 끝나면 꼭 전화를 한다. 시험 결과가 어떻든 그간 맘 고생한 양아를 몰아세우지는 않는다. 그걸 양아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암기 과목 점수가 자꾸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대체 어떤 문제를 틀렸을까 궁금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암기하는 습관을 기를 걸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아이들을 먼저 길러낸 선배 교사들은 고등학교에서 하는 공부가 진짜라고 했다. 초중등학교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도 했다. 고등학교 이전 성적은 쓸 곳이 없으니 꼭 잘 나와야 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던 사람들이 양아만 보면 공부 잘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니 학생이라면 응당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학생이 공부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학년이 무엇이 되었든 학생인 이상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중학교 때까지는 부모가 이끌어줄 수 있는데, 고등학교까지는 못 끌고 가요. 특히 수학은 더 그래요. 어릴 때부터 너무 힘 빼면 오히려 고등학교 가서 공부 안 해요.


  결혼 전 함께 근무했던 여자 수학 선생이 했던 말이다. 너무나 단정적으로 말해서 당시 그녀의 자녀가 고등학생 정도는 되는 줄 알았다.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초등 학생 자녀 두 명이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를 귀찮게 하던 아이들은 수많은 수학 경시대회를 다니면서 우등상을 딴 모양이었다. 거실에 아이들이 따온 상패와 메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 힘 빼지 말라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저 웃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다들 말로만 그러고 최선을 다해 교육을 시킨다. 

  수학 선생이 했던 말 때문인지, 유독 수학이 신경 쓰였다. 너는 국어교육학과 남편은 법학과를 졸업했으니, 양아는 수학을 못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특히 너는 수학조차 암기과목처럼 공부하던 사람이다. 수학은 타고난 머리가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서 특히 신경을 썼다. 수학 머리를 기르기 위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창의 수학을 가르쳤다. 그런데 양아는 암기 과목에 취약하다. 영어 수학 학원만 보내서 그런 걸까. 별생각이 다 든다.


  시험이 뭐라고 이토록 불안한 걸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고민의 끝에 대입이 있다. 양아가 원하는, 어쩜 너와 남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일.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양아는 12년간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자라나야 한다. 시험이 끝나고 양아가 시험지를 가져왔다.


  학교 시험지 가져왔으면 꺼내 봐.


  양아가 가방에서 꾸깃꾸깃해진 시험지를 꺼낸다. 


  암기 과목도 모조리 꺼내 봐.


  그건 없어. 학교 사물함에 있어.


  내일 꼭 가져와.


  왜?


  왜긴! 암기 과목이 안 되니까, 엄마가 한 번 살펴보고 대책을 세우려고 그러지.


  암기 과목 꼭 공부해야 해?


  너는 영어 시험지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들어 양아를 쳐다본다.


  그럼 안 하냐?


  필요한 지식은 인터넷에 다 있는데, 그걸 막 외워서 시험 치는 게 의미가 있냐 이 말이야.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지식이란 게 있지. 너는 사람들하고 대화할 때 매번 인터넷 뒤져 가면서 대화할 거니?


  암기 과목 좀 못한다고 사람들이랑 대화도 못 할까 봐?


  그럼, 머릿속에 든 게 없는데 어떻게 대화하니?


  엄마 참 답답하다. 요즘 애들이 모르는 게 있는 줄 알아. 매일 에스앤에스 하면서 생활하는데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어. 


  그런 게 제대로 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니. 단편적으로 조각난 정보들에 불과해. 그리고 유튜브에 떠도는 정보는 정확도가 떨어져. 너무 맹신하면 안 돼. 그래서 교과서라는 게 있는 거고. 그리고 공부는 꼭 지식 자체를 쌓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니야. 내용을 이해하고 익히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두뇌가 발달하는 거야. 


  말은 이렇게 하면서 양아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너도 암기과목을 공부시키고 싶지 않다. 양아는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독서를 많이 한 아이다. 책을 좋아하는 걸 보고 공부 걱정은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교과서는 스스로 읽고 싶어 하지 않았다. 특히 과학을 싫어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양아는 곤충 도감과 동물 백과사전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잘 보던 아이였다. 책 속에서 만난 동물에 대한 호기심이 실제 세계로 고스란히 이어져 생물학자나 생태학자가 될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양아가 교과서로 만난 과학에 흥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다채롭고 흥미로운 것들을 학교 밖에서 이미 경험한 아이를 학교라는 시스템 속에 가둬둔 기분이다. 


  너는 결국 암기과목 시험지를 확인하고 오답 노트를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국·영·수 중 유일하게 틀린 영어 문제는 해당 단원까지 다시 공부하게 했다. 


  관계대명사만큼 쉬운 문법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틀리니! 관계대명사 What과 의문사 What은 결국 해석을 해봐야 정확하게 구분이 돼!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오답 노트를 작성하는 양아를 보면서 한마디 더 하려다 입을 다문다.


  근데 엄마, 시험이 다 끝났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학교에서도 시험지 오답 풀이도 안 하고 넘어가는데.


  신기하구나, 학생들이 질문 안 하니?


  중딩들은 그런데 관심도 없어. 엄마는 고딩들만 가르치니까 그렇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해. 성적만 나오면 끝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건 알고 넘어 가야지.


  모르겠어. 학교 시험이 그렇게 중요한 건지. 애들이랑 매일 경쟁해야 하고. 그게 제일 싫어.


  그래도 옛날처럼 성적표에 등수가 표시되지는 않잖아. 


  그럼 뭐해. 시험 끝나면 우등상 수여하고 등급별로 또 구분하는데. 3학년 되면 상급반 따로 만들 거래. 오늘 담임 선생님이 그러셨어.


  상급반?


  학교 마치고 따로 교과 방과 후랑 자율학습까지 한다고 했어. 특목고 대비도 할 수 있게.


  넌 지원할 거니?


  글쎄, 잘 모르겠어. 지원자가 많으면 시험을 쳐서 선발한대. 안내장 나온다고 했어.


  그럼 준비를 해야겠구나.


  근데, 그걸 꼭 해야 해?


  들어갈 수만 있다면 가면 좋겠는데. 공부하는 애들만 모아 놓으면 오히려 더 좋지 않겠니. 친구 관계도 좋아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은솔이 그 무리들이 거기에 들어 오지는 못 할 거 아니야.


  당연하지. 그놈들이 상급반에 어떻게 들어와. 거기 들어가면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한단 말이야. 난 만화 그리고 싶은데.

 

  만화는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 길로 갈 건지 아직 결정한 것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상급반 지원을 안 할 수는 없지 않아? 뭘 하든 학생은 공부는 해야 해. 상급반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면 학교 내에서 차별받고 그럴 거 아니니.


  그렇겠지. 3학년 선배들 보니까, 상급반들끼리 모여 다니더라. 엄청 잘난 척하면서. 선생님들도 차별하고.


  정말이지 학교는 너의 학창 시절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서른 살이나 차이 나는 딸아이가 같은 교과목을 배우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세상은 변하고 정보는 범람하는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목은 수십 년 전과 변함이 없다니……. 학교는 정말 거의 바뀐 게 없다. 변한 세상만큼 아이들의 꿈도 변했는데, 학교는 왜 아이들의 꿈을 대비해 주지 않는 걸까? 상급반이 존재한다는 것도 답답하다. 상급반이 있다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알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될 뿐만 아니라, 선생들도 은연중에 아이들을 차별한다. 들어가도 문제, 들어가지 않아도 문제다.


  엄마, 난 영어 수학 점수가 올라도 이젠 기쁘지 않아. 


  왜? 성적이 오르면 너도 좋은 소식이라고 엄마한테 전화하잖아.


  그건 점수 확인할 때, 그때뿐이고, 조금만 지나면 또 부담감이 생기더라. 백 점 맞으면 다음 시험에서 또 백 점 맞기 위해서 열나게 공부해야 하고, 성적이 내려가면 다시 올리기 위해서 열나게 공부해야 하잖아. 그럼 난 언제 쉴 수 있는 거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대꾸할 말이 없다. 양아의 말에 말문이 막힌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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