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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23. 2024

변수

  어느 정도의 악연이 되어야 원수라고 할 수 있을까. 너도 살아오면서 싫어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을 만큼의 악연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현재로선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이런 게 고통을 견뎌낸 시간 뒤에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주어지는 망각이란 걸 안다. 잘 잊어버린다는 게 때론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물론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잊고 사는 경향이 있어 당황하는 순간도 있다. 망각은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다. 산발적으로 아무 기억이나 사라지게 한다. 20년 넘게 연락하며 지내는 동기들과 만나게 되면 종종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너, 기억 안 나? 왜 너 남편이랑 연애할 때 학교 도서관에서 밤샌다고 거짓말하고 나랑 너랑 너 남편 자치 방에서 하룻밤 보냈던 일.


  고등학교 동기인 수지와 1박 2일 여행을 갔을 때였다. 수지가 첫째를 대학에 보내고 모처럼 생긴 일상의 틈에 여행을 가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우린 결혼 후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의 숙소에서 올곧이 화장을 벗겨내고, 파자마 차림으로 작은 탁자가 있는 의자에 앉았을 때 수지가 옛이야기를 꺼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귀가 시간 통제에 시달리며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시험 기간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당시 선배였던 남편의 자치 방에서 둘이 아닌 친구와 셋이서 밤을 보냈다니……. 그런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텐데도 너의 기억에 없었다. 친구가 기억하고 있는 너의 연애사를 당사자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웠다. 얘기를 듣다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그날 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결국 소환되지 않았다. 너의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진 기억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니, 이 정도면 기억 상실증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너는 별수 없이 타인의 기억으로 소환된 불완전한 과거를 너의 기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엄마가 되고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너의 기억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한 게. 네가 가진 기억의 총량이 보잘것없어서 양아와 보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기억을 지워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네게 분명하게 떠오르는 건 양아와 한 공간에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아이다. 양아를 힘들게 하는 아이는 너와도 악연이 되었다. 양아는 아직 어리고 망각이란 선물이 주어질 만큼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니 그런 시간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불편하고 해로운 존재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상급반은 그런 측면에서 안전한 곳이기를, 제발 그런 곳이길 바란다. 


  상급반 수업을 받은 지 한 달째. 양아가 많이 지쳐 있다. 


  엄마, 상급반에서 자체 평가한다는데.


  언제?


  한 달에 한 번 정규 평가하는데, 수능형으로 시험을 친다는 거야.


  수능형 문제는 평소에 다뤄주긴 하니?


  선생님이 주는 프린트가 있긴 한데, 잘 모르겠어.


  수능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한테, 무대뽀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인가.


  상급반 운영에 대한 설명회가 있다는 문자를 받긴 했지만, 직장 때문에 갈 수 없었다. 양아를 보내놓고 아이 입을 통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듣게 되다니, 엄마로서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나 그냥 나가고 싶어. 벌써 두 명 나갔어.


  뭐?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만둬.


  매달 수능형으로 시험 치고, 성적도 공개한다고 하니까 바로 나가버리더라. 


  그게 뭐라고 공개하니. 참……. 지레 겁부터 먹지 말고. 


  성적 떨어져서 그만두면 그게 더 창피한 일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열심히 해 봐. 아빠도 그러고 해볼 수 있는 만큼은 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 친구들하고는 어떻니, 지낼 만하니?


  처음 일주일간은 서로 적응하느라 몰랐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이미 알고 있는 아이들끼리 뭉치기 시작하더라. 


  넌 어떤데?


  내가 친한 애들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도 이야기는 하고 지내. 근데, 애들 사이에 있으면 내가 모르는 자기들만의 이야기가 있어서 편하지는 않아. 그래서 일부러 혼자 있기도 해.


  좀 어색해도 아이들이랑 잘 지내려고 노력해 봐.


  양아는 상급반에서 아이들과 썩 잘 어울리지는 않아도 그렇게 못 지내는 것 같지도 않다. 지금 가장 부담스러운 건 상급반에서 치르는 정규시험인 게 분명하다. 성적을 공개하면서까지 아이들을 긴장시키다니, 정규 수업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정규로 주어지는 혜택이다 보니 막 나가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무 사항도 아니고, 불만이 있으면 그만두라는 식이다. 일단은 양아를 믿어 보기로 한다. 가장 이상적인 환경은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라는 범주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할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순순히 양아가 하자는 대로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양아는 주말이 되어도 편히 쉬지 못한다. 과목별로 치르는 단원 평가와 월말 평가 준비로 주말까지 올곧이 할애해야만 한다. 불 켜진 방문을 열어보면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도 있다. 아이를 흔들어 깨우며 침대에서 자라고 해도 아이는 좀처럼 편히 눕지 못한다. 


  엄마, 내일까지 영 단어 다 외워 가야 해. 다 못 외우면 집에 안 보내 준댔어.


  그냥 하는 말 아니야? 집에 안 보내 주면 부모들이 가만히 있니?


  그런 모양이지 뭐. 


  걱정하지 마. 만약 안 보내 주면 엄마가 전화할게.


  그러지 마. 다른 아이들은 집에 못 가고 있는데 나만 나올 수 없잖아. 


  그럼 남아서 외우는 애들도 있어?


  그래, 통과 못 한 아이들 계속 남았단 말이야. 


  하……, 참나. 그럼 엄마가 외우는 거 도와줄까?


  아니, 그냥 혼자 외울게.


  그럼 연습장을 이렇게 접어서 뜻만 보고 스펠링 써봐. 그럼 잘 잊어버리지 않아. 


  해줄 수 있는 게 점점 없어진다. 상급반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대로 괜찮은 건지 확신도 없어진다. 암기에 취약한 양아가 긴 영 단어를 외우기 위해 잠 못 드는 밤이 계속된다.      


  상급반에 들어가고 석 달째, 그러니까 양아는 세 번의 월말 평가를 치렀다. 그러고도 수없이 많은 단원 평가를 치러내고 있다. 아이의 생활이 위태로워 보인다. 그사이 그만둔 아이들이 늘었는지 추가 모집 시험 일정이 교내에서만 공시된 모양이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차에 탄 양아가 소식을 전해준다. 


  상급반에 들어올 애들 또 시험 쳐서 뽑는데.


  얼마나 빠졌는데?


  삼 분의 일 정도는 빠진 것 같아.


  그게 뭐야. 그럼 상급반도 아니잖아.


  아이들이 빠질 때마다 추가로 모집을 하게 되면 계속해서 내려가게 되어 있다. 그럼 처음 시작했을 때의 상급반이 희석되어 웬만하면 다 들어오는 구조가 되어버린다. 이런 분위기라면 상급반이라는 자부심도 없어질 것 같다. 

  분위기에 휩쓸리지만 않는다면 양아는 이대로 쭉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두 달이 지났을 때부터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곧 있으면 백일을 넘기게 될 것이다. 백일을 보낸다는 건 시련을 견뎌낼 힘이 있다는 증거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설화를 자꾸 봐서 그런지 일상생활에서 백일만 버티면 기적 같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백일이라는 신화적 시간을 보내게 되면 양아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룰 것 같다.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고 백일까지 딱, 일주일을 남기고 있는 날이다. 평소처럼 양아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벽시계가 12시를 막 지나고 있다.      


  얼른 씻고 자. 너무 무리하지 말고.


  평소 같았으면 자기 방으로 바로 들어가 버렸을 양아가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 갑자기 털썩 주저앉는다. 방금 눈 앞에 서 있던 기둥 하나가 무너져 내린 것 같다.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남편이 양아의 머리를 짚으며 말한다.


  왜 그래?


  너도 양아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그냥 봐도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상급반에 은솔이가 들어 왔어. 


  뭐? 걔는 공부 못한다고 하지 않았니? 


  몰라, 여기 들어오려고 준비한 모양이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설사 은솔이가 예전처럼 양아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여전히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악연의 기억에서 놓여나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상급반을 그만두라고 말하기는 싫다. 그러면 정말 은솔에게 말리는 꼴이 된다. 


  나…….


  여기서 그만두면 너, 정말 지는 거야. 


  양아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기어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만다. 아이의 상처를 다시 한번 지져놓은 기분이다. 너에게 묻고 싶다.


  정말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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