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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18. 2024

데미안이 되어라

  올해 겨울은 작년보다 더 늦게 닥칠 모양이다. 방학이 되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는데도 늦가을처럼 물기 없는 잎들이 가로수에 매달려 있다. 겨울 속에 머무는 가을. 가을 속에 머무는 겨울. 약간 비튼 문장의 의미는 엄연히 다르지만 달라질 건 없다. 12월이 겨울이라는 규정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훗날 12월의 기후가 가을과 같아지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마지막 달을 겨울이라 명명할 것이다. 제때 옷을 바꿔입지 못한 계절 탓인지 겨울 방학을 맞이하고도 신이 나지 않는다. 양아가 중학생이 된 후로 크리스마스도 의례적인 행사일 뿐, 어떤 기대나 흥분이 없다. 아이는 그만큼 자랐고, 더는 현실과 맞지 않는 말로 아이를 구슬릴 수 없다. 양아는 학원을 다녀오면 곧잘 문을 잠가버린다. 어쩌다 방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누군가와 한참 수다를 떠는 것도 같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땐 우리가 허용하지 않는 무엇에 골몰하고 있을 것만 같다.


  상급반 대비는 하고 있니?


  저녁을 먹고 있는 양아에게 네가 묻는다.


  응, 학원에서 기출문제 풀어 봤어.


  문제는 어땠니?


  뭐, 그럭저럭 풀만 했어.


  다행이구나!


  국‧영‧수만 친대.


  정말? 그럼 따로 준비할 것도 없네. 학원 다니고 있으니, 그냥 치면 되는 거 아냐?


  잘 모르겠어. 그걸 꼭 해야 해?


  상급반이 없으면 모를까, 할 수만 있다면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남편이 끼어든다.


  거기 들어가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단 말이야. 학원 쌤이 그러는데, 상급반 아이들은 수능 시험 대비도 같이한다고 그랬어.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수능형 문제에 익숙해지면 좋지. 


  남편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한다. 


  알겠어. 


  양아가 포기하듯 대답한다.


  방학인데 독서 좀 하지 그래. 책 보면서 마음 정리도 좀 하고.


  통 입맛이 없는지 깨작거리며 먹고 있는 양아를 바라보다가 불쑥 책 이야기를 꺼내 본다.


  추천해 줄 책 있어?


  양아가 관심을 보인다.


  책이야 얼마든지 있지. 음……, 데미안 읽어 봤니?


  아직. 


  그럼 데미안부터 읽어 봐. 읽어 보고 괜찮으면 방학 동안 헤르만 헤세 작품 몇 권 읽어 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응.


  그나마 책에 대해선 거부 반응이 없는 터라 잘 먹혀든 것 같다. 데미안을 받고 하룻밤 사이에 다 읽었는지 다음 날 아침 데미안 책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벌써 다 읽었니?


  응. 


  어땠니? 지루하지 않았어?


  흥미로웠어. 데미안은 엄청 근사하더라.


  그래? 데미안의 어떤 점이 근사했니?


  크로머한테서 싱클레어를 구해냈잖아. 어떻게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러게, 어떤 방식으로 그랬는지 나왔으면 좋았겠는데, 나도 그게 좀 궁금하긴 하더라. 


  어떤 방식인지 나와 있지 않아도 데미안이 가지고 있는 힘이 뭔지는 알 것 같아.


  그게 뭔 것 같아?


  음, 용기.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대변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인물이야. 근데 데미안 같은 친구는 존재하지 않아. 내 주변엔 크로머와 동조자, 방관자들뿐이야.


  그렇다면 너 스스로가 데미안이 되면 되잖아.


  말해놓고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럴싸한 말로 순진한 아이에게 바람이나 불어 넣는 위선자 같다.


  내가? 어떻게…….


  같은 반 아이들 중에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도와줄 수 있지 않겠니? 동조자나 방관자가 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너는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이건 너무 교과서적이다. 친구를 도와주는 것보다 자신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현실적이지 않은가.


  어려움에 처한 친구 따윈 없어. 모두 한통속이야 혼자 있는 애는 나 혼자뿐이라고. 


  그럴 리가.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야? 


  몰라, 관심 없어. 내가 편들어 줄 만큼 약한 아이도 없어. 자기들끼리 싸우고 욕하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서 나한테 붙으려고 하는 애들이 있는데, 난 걔들 싫단 말이야.


  왜?


  그런 놈들은 또 날 배신할 게 뻔해. 그리고 다시 무리로 들어가서 없는 이야기 지어내고 욕한단 말이야.


  참나……. 글에서 데미안도 늘 혼자 다니지. 그러면서도 기가 죽거나 주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인물이야. 싱클레어가 이상적으로 생각할 만큼. 그런 측면에서 데미안이 될 수도 있지 않아?


  나도 데미안처럼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해?


  음……,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구나. 일단 뭔가 많이 알아야 할 것 같지 않아.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에너지를 뿜어내려면 말이야. 


  양아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 너는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신비로운 힘을 가진 데미안은 작가가 지어낸 이상적 형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양아에게 데미안이 되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아는 데미안을 통해 느낀 게 있었는지 수레바퀴 밑에서와 싯다르타까지 읽겠다며 책을 챙겨 방으로 들어간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추락하는 성장기를 보낸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삶이 반영되어 있어서인지 관심을 보이는 것도 같다. 아마도 그의 글 속에서 양아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심리적 갈등을 읽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대학생이 되어 데미안을 읽어서 그런지 지루한 고전 한 편을 읽었다는 느낌 이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헤르만 헤세의 삶이 투영된 작품 정도로 이해하면서 한 인간의 내면적 갈등을 엿보는 정도였다.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고전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된다. 며칠 세 수레바퀴 밑에서와 싯다르타까지 모두 읽은 양아는 어떤 생각에 잠긴 것처럼 차분한 모습이다. 너의 말도 안 되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양아에게 데미안이라는 강렬한 가상의 친구를 붙여준 건지도 모르겠다.     


  양아는 겨울 방학 막바지를 상급반 시험 준비를 하며 보내고 있다. 양아도 자발적이지는 않지만, 큰 저항 없이 시험에 임하고 있다. 내심 상급반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길 바라며, 양아의 학교 생활이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너도 남편도 양아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양아는 예상대로 무난하게 상급반으로 진입했다. 


  따로 공부한 것도 없는데…….


  양아는 은근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너도 남편도 양아가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이는 네가 원하는 대로 시험에 응모했지만, 막상 합격자가 공고되고 나니 또 다른 걱정이 밀려든다. 양아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학교에 종일 붙들어 놓는 게 옳은 일일까. 


  여보, 양아가 학교에서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데 괜찮을까?


  글쎄, 힘들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피할 수만은 없잖아.


  상급반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수능 대비까지 한다고 하니, 부모 입장에서는 큰 혜택이지. 어차피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에 대비는 해야 할 것 아니야.


  상급반 아이들이라고 뭐가 다를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 다른 학교로 가는 것도 아니고, 걔들이 걔들이잖아. 


  그래도 공부하는 애들끼리는 좀 다르지 않을까? 일단 지켜봐야지.


  남편도 양아가 공부로 뭔가를 해낼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런 부모의 기대를 양아도 모르지는 않는다.


  중학교 3학년 새 학기의 시작은 유난히 부산스럽다. 상급반 방과 후 수업과 자율학습이 개학과 동시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상급반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교로 가면 학생들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자가용으로 학교 주차장이 만원이다. 아직 중학생밖에 되지 않았는데 고3 수험생 부모가 된 느낌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가 끝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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