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축구 싶냐?》
축구는 가로 100m, 세로 64m의 공간에 22명의 사람들이 두 팀으로 나눠져, 공 하나를 가지고 상대의 골대에 골을 넣어 승리를 가른다. 두 팀은 저 공간 위에 포메이션을 짜고 각 포지션에 선수를 배치해 전략을 세운다.
포지션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선수 한 명의 위치만 달라져도 게임의 승패가 바뀌고 선수의 플레이가 바뀐다. 그래서 리더는 팀의 상황에 맞는 포메이션을 만들고, 팀원들에게는 최적의 포지션을 찾아줄 수 있어야 한다.
2002년 월드컵 전까지, 정확히는 히딩크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 한국 축구는 3-5-2* 포메이션을 주로 사용해왔다. 그때까지 우리가 아는 박지성은 공격수가 아닌 측면 수비수 혹은 수비형 미드필더와 같은 수비 포지션에서 뛰던 선수였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4-3-3과 3-4-3 포메이션을 사용하며 한국팀을 공격적이고 빠른 팀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전임 감독들에게 수비수로 분류되던 박지성의 숨겨진 공격 본능을 찾아, 윙 포워드라는 포지션의 공격수로 전진시켰다.
별거 아니었다. 팀원들을 배치하는 포메이션 숫자가 바뀌었고, 선수들이 자리만 옮겨 다른 롤로 플레이하게 됐을 뿐이다. 이후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에 올랐고, 박지성은 월드컵을 거치며 세계 최고 선수로 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메이션이 바뀌자 새로운 재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풀백이었던 이영표, 터미네이터 차두리까지 모두 본래 뛰던 포지션보다 새로운 위치에서 더 뛰어난 플레이를 펼쳤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중학교에 축구팀을 만들 때, 옆 학교에서 전학 온 친구가 하나 있었다. 이미 옆 학교팀 소속 측면 수비수로 뛰고 있던 친구였다. 체육 시간에 함께 축구해보면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꼭 그 팀 소속으로 시합에 나가면 늘 수비 실수를 하고 욕을 먹었다. 문제는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더 위축되어 실수를 더 자주 하는 것이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어차피 전학도 왔겠다, 우리 팀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우리 팀에 오면 그 친구에게 딱 맞을 것 같은 포지션도 있었다. 바뀐 포지션에서 욕 대신 응원을 받으면서 뛰다 보면, 분명 반전을 보여줄 거란 근거 없는 확신도 있었다.
버디버디*로 옆 학교 주장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우리 팀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그렇게 해주면 다음부터 경기할 때마다 음료수 1병씩 사주겠다고 제안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나름 '선수 이적 협상' 과정이었다. 옆 학교 주장의 대답은 OK였다. 어차피 수비 실수를 많이 해서 팀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를 따로 불러 잘 설득하고, 팀원들에게도 영입 사실을 알렸다.
이적을 완료하고 함께 훈련을 시작하면서 우선 친구의 포지션을 측면 수비수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경시켰다. 수비 실수는 가끔 하지만, 그 친구에게는 다른 팀원들에게는 없는 강한 체력과 슈팅력, 악바리 근성이 있었다. 친구는 자신 없다고 했지만 날 믿고 딱 3개월만 이 포지션으로 뛰어보자고 했다.
결과는?
옆 학교와 경기에서 수비가 약해 늘 마지막에 역전당하던 우리는 그 친구가 들어온 이후, 졸업할 때까지 옆 학교에게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3학년 때는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고양시장배 축구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차지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가게 됐을 때, 그 친구는 고양시 전체에서 축구 잘하는 애들이 모여 있던 팀의 주전이 되었다.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난 팀플레이가 필요한 모든 곳에서 포메이션과 포지션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각자 역할을 받고 태어난다는 말처럼, 축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명 딱 맞는 포지션이 있다.
축구 밖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팀 포메이션 안에서 각자의 포지션을 가지고 플레이한다. 지금 퍼포먼스가 좋지 않은 팀원이 정말 '못해서' 그런 걸까? 어쩌면 잘 맞지 않는 포지션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팀원들의 성향과 반대가 포메이션으로 팀이 운영되고 있는 건 아닐까?
선수를 비난하는 건 쉽다. 하지만 맞지 않는 포지션에서만 플레이하게 했다면 책임은 리더에게 있다. 리더라면 팀을 위해서라도 팀원에게 맞는 포지션을 찾아줘야 한다.
선수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시키는 일만 하면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고개 숙이고 좌절할 게 아니다. 본인에게 맞는 포지션을 찾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찾았다면 그 포지션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고, 그게 안 되면 그 기회를 주는 팀을 찾아 떠나야 한다. 그러다 보면 좋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팀과 포지션을 찾게 된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회사에서 뛰고 있는 포지션이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다행이다. 하지만 포지션이 맞는다고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포지션을 찾았으니 이 자리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 훈련하고 또 훈련해야 한다.
그렇지만 어찌 됐던 결국 시작은, 포지션부터다.
*포메이션 3-5-2, 4-3-3, 3-4-3 등의 숫자는 골키퍼를 제외한, 수비수-미드필더-공겨수의 수를 뜻한다.
*버디버디는 지금의 카카오톡 PC버전과 같은 PC형 메신저 프로그램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