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널 보았을 때
다른 길로 갈까 생각했는데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이라는 곡을 아시나요?
1995년 6월에 발매된 혼성그룹 투투의 노래다.
어느 날 늦은 오후, 남편과 동네 산책을 하고 있었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말 끝에 남편이 부른 노래 한 구절.
“멀리서 널 보았을 때, 다른 길로 갈까 생각했는데~~”
뜬금없는 노래에 남편에게 물었다.
“응? 갑자기 뭐야?…..??”
남편은 대답 대신 또 같은 구절을 반복해 부른다. 장난스러운 표정의 남편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노랫말을 귀담아들으니 어떤 의미로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남편은 종종 뜬금없는 아재개그를 던진다. 나는 곧바로 파울로 받아친다. “으익. 그게 뭐야. 하나도 안 웃겨. “ 살짝 인상을 찌푸리거나, 무표정으로 대응한다.
나를 웃겨주려는 노력과 재치를 생각하면 좀 웃어줘도 될 것 같지만, 그게 참…. 안된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 순간적으로 어디서 저런 개그가 떠오르는 걸까. 신기하기도 하네. 머리가 좋아야 아재개그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재개그를 개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탓에 진지한 평가만 받은 채 묻혀 버리곤 한다. 그래도 가끔 남편에게 머리가 좋은 것 같다고 말해 준다.
가끔씩 우스개 소리를 하는 남편이지만,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나? 하는 의문을 갖는다. 아재개그와 말장난들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신기하다.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거니와 가뭄에 콩 나듯 아재개그? 라도 치면, 남편은 굉장히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본다. (뭐야… 본인이 하면 웃기고, 내가 하면 인상 쓰고… 뭔데…. 하긴, 내가 생각해도 개그 쪽은 어울리지 않는 듯.) 나도 공부해서 개그능력을 키워야 하나.
이쯤에서 다시, 오늘의 이야기인 나의 주제곡으로 돌아가 보자.
‘멀리서 널 보았을 때~ 다른 길로 갈까 생각했는데~~’ 중독성 있는 가사 구절이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 된다.
이 노랫말에 담긴 남편의 마음을 생각하면 마구 웃음이 나면서도 뒤가 씁쓸하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표현한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로 했다.
(지금부터 ‘남편’이란 단어 대신 ‘그’라고 지칭하련다.)
결혼 6년 차. 요즘 다시 짙어지는 생각이 있다. 서로가 참 안 맞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외의 것들로 채워가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남편은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고 세심하다. 나와 달리 청소와 정리정돈에는 관심이 없지만, 정성스레 요리를 해준다. 휴일을 보내는 방법이 서로 다르지만, 예술적 취향을 가진 것이 비슷해 공허한 부분이 채워진다. 상대방에게 맞춰주고 배려해주려 노력한다. 그에 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크게 주장하지 않는다. 등 등.
우리 부부는 둘 다 말투에 대한 예민함을 가지고 있다. 차근차근 상냥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데, 조리 있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서투른 모습을 보인다.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아서 인지, 대화의 기술이 부족해서 인지. 때때로 대화 도중 힘이 빠지곤 한다. 깊이 있고 진솔한 대화를 시작도 하기 전에 연결음이 끊어지는 느낌이랄까.
나는 특히,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와 질문의 초점에서 빗나간 대답에 예민해 지곤 한다. ‘도대체 왜 저렇게 대답하는 거지.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닌데!’
한 가지 예로 아침에 시간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그에게 ‘여보, 지금 몇 시야?’라고 묻는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 ‘……어,, 더 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도대체 왜 저렇게 대답하는 걸까.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닌데 말이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난 그저 시간이 궁금했을 뿐인데,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잠이 부족할까 봐 더 자라는 의미인 건 알지만, 단순하게 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주면 좋겠다.
또 하나의 예로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주말마다 나가자고 해서 피곤함을 느끼는 것 같아 이렇게 물었다.
”오늘은 쉬고 싶다며, 카페 가서 있으면 피곤하지 않을까? “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 좀 짜증 난다는 표정과 어투?로 그가 말했다.
“카페에 주구장창 있을 거 아닌데!”
그 순간 그의 말투가 나를 찔렀고, 기분이 상한 나는 ‘왜 그렇게 비꼬면서 이야기해?’라며 후공 찌르기에 들어갔다. 나 상처받았으니 너도 받아!라는 방어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선 그의 대답들이 질문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만의 생각에 방어막을 치고, 둘러 말하는 것처럼 들리곤 한다. 지금 몇 시인지 물으면 그저 ’시간‘을 알려주면 된다. 피곤하지 않을까 물어보면 ‘피곤한지, 안 피곤 한지, 그저 그런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 주면 된다. 나와는 다른 생각필터로 질문을 받아들이는 상대방.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일까. 서로 다른 사람이기에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인지하고 느끼는 것에 차이가 나는 까닭일까.
왜?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서로의 답답함에 뒤로 물러나는 걸까. 혹은 콕콕 찔러보는 걸까. 사실 두 방법 모두 속 시원한 해결책이 나오진 않는데 말이다.
서로의 솔직한 생각이나 감정을 뒤로 숨긴 채 물러서는 방식은 회피와 숨 막히는 침묵만 남긴다. 그리고 ‘도대체 왜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야? 내 말 뜻은 그게 아닌데!’와 같이 상대를 찌르는 대화 방식은 상대로 하여금 그 상황을 회피하게 만들거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방어막을 친 뾰족한 말과 행동을 내뱉게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에 한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뒤로 물러나는 건 주로 남편, 콕콕 찌르는 건 주로 내가 보이는 패턴인 듯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자기 방어적 태도가 아닐까.
단순히 생각해 보자.
나는 단순한 대화의 주고받음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이 답답하다. 여기서 ‘제대로’의 의미는, 내가 말하는 의미 그대로 받아 들여지지 않고, 상대가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답답한 내 마음에 숨구멍을 내기 위해 상대를 콕콕 찌른다. (솔직히 내가 생각하기엔 찌름의 세기가 그다지 강한 것 같지 않지만, 그는 세다고 느끼는 것 같다. 감정이나 생각의 정도는 상대적인 것이니 이해해 보기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내 마음이 답답했던 이유는 나의 질문에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그가 회피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무시당하는 게 싫거나,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해 봤자 수용되지 않을 것 같으니, 대답을 안 하거나, 딴소리를 하거나, 엉뚱하고 가벼운 농담으로 그 순간을 넘겨버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나의 눈치를 살피며 배려하다 보니, 때때로 힘들어지고, 기운이 빠지고, 답답함을 느꼈을 그가 아니었을까. 자신도 알게 모르게 쌓여왔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짜증 섞인 어투와 까칠해진 감정으로 툭하고 튀어나온 것이 아닐까.
“주구장창 있을 거 아닌데!!“ 라는 그의 대답.
평소 이런 강한?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 툭 던진 말이라 그런걸까. 내가 이렇게 까지 서운해 하고, 상처받을 줄은 몰랐다. 그저 가볍게 넘겨도 되었을 말을 가슴에 박아버린 나의 마음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자.
그 이유가 뭘까. 그가 말했던 ‘카페에 주구장창 있을 거 아닌데’라는 표현 대신에, ‘나는 카페에서 잠깐 그림 그리다 집에 가고 싶어. 너무 오래 있으면 힘든데. 나도 쉬고 싶다.’와 같은 솔직한 표현을 원한다. 둘러 말하지 않고, 말의 의미를 오해 없이 바로 파악할 수 있는 방식 말이다.
그와의 일을 다시 생각하다 보니, 문득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회피하던 모습,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의견이나 감정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위축되어 낮은 자신감을 보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에게 내 의견을 전달했을 때 돌아오는 거부적이고 권위적이인 표현들. 나와는 다른 생각을 주입시키려는 태도에 맞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날아오는 화살에 대비할 방어막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것 같다. 아버지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하거나 대화하는 것이 어색하고 편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아버지에게 솔직한 나의 목소리를 강하게 드러내 곤 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저 00, 대드네’라는 날선 공격적인 표현이었다. 지금이야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많이 치유되고, 우리에게 강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입장도 헤아려진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위축되었던 나의 모습이 남편에게서 보였던 것이 아닐까.
자신의 어두운 면이 타인에게 투사되어 보일 때, 그 사람의 어떤 면이 유독 싫거나 눈에 거슬린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나오는 ‘그림자 투사‘ 이론의 내용이다. 무의식 속 나의 어두운 면이 (그림자: 불쾌하거나 열등하여 의식에게 거절당한 인격의 한 측면을 말한다) 어떤 대상에 투사되어 보일 때, 그 모습에 부풀려진 과장된 감정반응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림자 투사’ 이론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나의 무의식 속 ‘그림자의 한 부분’이 남편에게서 보였고, 그 회피적인 태도가 ‘과장된 부정적 감정반응’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회피적인 태도가 문제가 아닌, 나의 회피적 태도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상대방의 싫은 점이 곧 나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면 불편했던 감정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의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태도가, 결국 나의 어두운 면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오늘의 글쓰기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
글을 쓸수록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본인이 원하는대로 휴일에는 집에서 푹 쉬면서 충전하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그와 반대로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맞춰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혼 전에는 청소나 정리정돈을 안 해도 잔소리하거나, 귀찮게 하는 사람 없이 편하게 살았을 사람인데. 결혼 후엔 주말아침 부스럭대는 소리에 늦잠자기도 힘들고, 밥먹고 카페도 가야하고, 나가 놀아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쉬고 싶었을까 싶다. 사실 지금까지 몰랐던건 아니지만, 함께 해주고 맞춰가길 바랬다.
솔직히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여전히! 기대와 바람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가 얼마나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를 인생인데, 이왕이면 다양한 경험과 즐거운 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면 좋지 않을까. 세월이 지나 혼자가 되었을 때, 함께했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살아갈 힘을 얻지 않을까. 아쉬움 한가득 담긴 바람이 마음속에서 쉬이 떠나질 않는다.
결혼하는 상대와 취미나 취향이, 휴일을 보내는 방법이, 대화의 패턴이 비슷한 사람이면 재밌고 좋다고 하던데… 모든 것이 다 잘 맞으면 부부가 아닐 터.
서로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보다는 상대의 입장이 되어 거듭거듭 헤아려보고, 공감하기 위한 마음수행을 하는것이 결혼 생활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아, 그보다 먼저 나의 마음 돌봄이 이루어져야 상대를 헤아려볼 수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멀리서 널 보았을 때
다른 길로 갈까 생각했는데~
가사에 담긴 그의 마음을 깊게 생각하면 여전히 좀 씁쓸하지만, 우스개 소리로 받아들이면 웃기고 재밌는 나의 주제곡이다.
내가 과연 농담을 농담으로, 개그를 개그로 가볍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와 그의 즐겁고 평화로운 결혼생활을 위해서 내 안의 어두움을 털어버리며 조금씩 가벼워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