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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맹 Sep 03. 2024

부잣집 딸의 탄생

배우자 선택의 기준 - 화목한 가정 (1)

학창시절부터 친구들에게 '부잣집 딸'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대단한 물건을 들고 다니거나 쉽게 소비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다방면으로 지원을 해주셔서 크면서 아쉬운 게 별로 없었던 거 같다. 좋게 생각하면 '여유'가 있었고, 반대로 생각하면 '간절함'은 부족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넘치는 사랑을 받고 컸다는 사실이다.




내 어린시절은 풍족하진 않았다. 아빠 24살, 엄마 26살 때 갑자기 내가 생기면서 두 분은 4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두 집안 모두 가난했기에 부모님은 단칸방 보증금만 겨우 빌려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아빠 월급은 40만 원, 화장실 딸린 단칸방은 월세가 13만 원이었다. 엄마는 나를 가지면서 꽤 오래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한 가족이 탄생했다.


2살 터울의 동생이 생길 즈음, 우리가족은 부산 전포동의 2층 주택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그때 기억을 되짚어보면 나는 주인집 언니, 오빠들과 재밌게 보낸 희미한 추억을 갖고 있는데, 부모님은 달랐다. 1층이 주인집이다보니 층간소음이 발생할까 늘 조심하고 여러모로 눈치를 봤다고 했다. 그때부터 자가의 꿈을 꾸던 부모님은 한차례 전세살이를 더 거친 후, 내가 9살이 될 무렵 양산 상북면에 있는 20평대 아파트를 매매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아빠는 노력해서 어느 대기업 공장으로 이직도 하게 되었다.


안정된 회사에 자리를 잡고부터 아빠는 홀어머니(할머니)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냈다. 아빠는 '가장'이자 '장남'이었고, 엄마는 '맏며느리'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우리가족은 4명이 아닌 5명으로 긴 시간을 함께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엄마는 집에서 종종 부업을 했다. 공장에서 막 나온 숟가락 표면의 비닐스티커를 제거하거나 낚싯바늘에 낚싯줄을 꿰서 묶는 작업 등 거실에 밥상을 펴고 밤늦게까지 일하던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럼에도 살림살이는 항상 빠듯했다. 결국 동생이 아직 유치원생일 때 우리집은 맞벌이 가정이 되었다.


엄마는 아파트 맞은편 작은 공장에 취직을 했다. 동생이 등원을 하기 전에 출근을 해야 했는데, 엄마는 동생에게 시곗바늘이 여기 오면 집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그런데 동생은 항상 시곗바늘이 오기 전부터 아파트 주차장에 나가있었다. 그땐 그런 동생을 바보라고 마냥 놀렸다. 돌이켜보니 시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보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싫었던 거 같다. 그래도 가족 같은 이웃이 존재했던 그 시절, 우리는 이웃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외롭기만 한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은 아니었다.


엄마는 7남매의 막내딸로 자라며 사랑을 많이 받고 컸다. 물론, 감천동 변변찮은 집에서 평생을 살았고 학비가 없어 교회에 딸린 학교를 힘들게 졸업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댈 곳이 꽤나 있었다. 반면, 아빠는 9살에 아빠(할아버지)를 여의고 3남매의 첫째로 어린나이부터 돈을 벌며 소년가장이 되었다. 엄마(할머니)가 동생 둘을 데리고 부산에 먼저 정착하러 떠나면서 아빠는 통영에 친척집을 떠돌며 지내기도 했다. 부산에 와서도 자리를 잡지 못해 교회에서 연계해 준 해외후원을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만큼 육아 가치관으로 종종 부딪쳤는데, 그럼에도 목표는 같았다. 자식들을 부족함 없이 키우는 것. 엄마는 공부 외에도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예체능 학원들을 보내주었고, 아빠는 최신아이템을 어떻게 알고서는 조르기도 전에 먼저 사주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5학년 때 반에서 최신휴대폰을 처음 갖게 된 학생이었다. 보아가 선전한 휴대폰이었는데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도 우리는 신축아파트로, 중심가로, 더 큰 집으로 이사를 다녔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많은 걸 주었지만 가난만큼은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나는 구김살 없는 '부잣집 딸' 같은 사람으로 자랐다. 자연스레 아빠 같은 사람이 이상형으로, 우리가족 같은 가정을 이루는 게 꿈이 되었다. 부모님은 33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잉꼬부부가 되었다. 아빠는 앞만 보고 살아오면서 모든 친구를 잃었지만 '엄마'라는 절친만 있으면 된다고 할 정도로. 엄마는 누구보다 강한 책임감으로 살아온 아빠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두 분의 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내 꿈 또한 여전히 진행 중이다.

1992, 부모님 결혼식 & 2001, 첫 우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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