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기 욕구에 대한 탐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일단 회사를 그만뒀지만 돈은 벌어야 했다. 20대 때부터 취미로 포토샵을 종종 사용했었는데 그 기술을 살리기로 결심했다. 내일배움카드를 사용해 단기속성으로 어도비 프리미어를 배웠다. 배운 지 3개월 만에 외주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개인사업자를 내고 초보대표가 되었다. 또다시 새로운 일을 배운다는 게, 심지어 사수도 없이 스스로 일을 익힌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때 전직 PD였던 남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편집만 하는 것보다 촬영까지 곁들이는 게 외주를 받아오기가 쉬웠고 종종 남편이 나와 동행해 일을 진행해 주었다. 사업자를 내고 반년만에 원래 받던 1년 치 연봉을 벌었다. 심리상담센터를 가도 나아지지 않던 내 상태가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이 나 자신을 조금씩 신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심리상담센터에 돈을 소비하고 남편 눈치를 봤다. 가뜩이나 돈 나갈 곳이 많은데 엄한데 낭비를 한 느낌이라 스스로 찔렸다. 하지만 남편은 내 머리 위에 있었고 나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생각해 봤는데 너한테 차가 있으면 좋을 거 같아"
남편은 본인도 삶이 버거울 때가 있었는데 드라이브를 하면서 많이 해소했다고 말했다. 그는 실행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 며칠 뒤 카톡으로 자동차 사진을 하나 보내더니 '이거 어때?'라고 물었다. 초보운전자인 내가 몰기에 딱 좋은 크기의 차였다.
[괜찮은데? 근데 웬 차야?]
[ㅇㅋ]
저녁에 집 앞에 나와보래서 갔더니 평소 거대한 SUV를 타는 남편이 경차에 몸을 구기고 앉아있었다. 그게 레이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하루 정도는 얼떨떨했고 어이가 없어서 화도 조금 났다. 이런 중요한 걸 'ㅇㅋ' 하나로 그냥 사와? 그때부터 어딜 가든 나는 레이와 함께였다. 루프박스와 평탄화를 할 수 있는 제품도 샀다. 한강 주차장에 가서 설치하면 그대로 캠핑을 즐길 수 있었다. 한창 코로나 시기라 캠핑장 예약이 힘들어졌는데 그럴 때 레이가 딱 좋았다. 가끔 운이 좋은 곳은 주차장 뷰가 캠핑장 사이트만큼 좋았다. 아침에 눈을 떴더니 안개에 싸인 충주호가 보이기도 했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남편이 조수석에 앉는 날이 많아졌다. 특히 남편이 병원에서 산동검사를 하거나 시술을 받은 후 차에 오르면 그때가 그렇게 뿌듯했다. 한때 나는 '남편한테 건강검진을 받았는지 물어볼 걸', '단거 먹을 때 말릴 걸' 이런 생각을 하며 자책도 많이 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운전을 하면서 많이 바뀌었다.
사람들과 분리된 공간이 생긴 것도 좋았다. 차에서 내 마음대로 노래를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화장을 하고 간식을 꺼내먹는 것도 모든 순간순간이 소중했다. 마치 '내가 원할 때 나는 차 안에서 아무와도 섞이지 않을 권리가 있어' 이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레이만큼은, 자동차 바퀴만큼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레이는 나와 딱 2년을 함께 했다. 더 오래 타고 싶었지만 장거리 운전이 잦아지면서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는 떠나는 날까지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 820만 원을 주고 산 중고차를 790만 원에 팔게 되었다. 캠핑 붐으로 레이의 수요가 올라가기도 했고, 감가 될 게 거의 없었다. 물론, 초반에 수리를 한다고 60만 원을 쓰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레이는 울산으로 간다고 했다. 짐을 하나 둘 빼면서 그간 쌓인 추억이 떠올랐다. 이 작은 차를 주차 못해서 지나가던 행인이 봐주었던 기억, 톨게이트 티켓을 뽑으려다 휠이 쓸린 기억, 슬픈 노래를 부르며 운전하다 오열했던 기억 등 초보운전이라 더 많은 추억이 생긴 거 같다.
지금 나는 2번째 차를 몰고 있다. 레이보다 3배나 비싼 차를 샀는데 만족도가 더 높아지진 않았다. 작지만 내부는 꽤나 넓고 가끔 바람이 세게 불면 휘청이지만 또 제 갈 길을 가는, 그런 레이가 친근해서 좋았다. 아마 앞으로 더 다양하고 좋은 차를 많이 만나게 되겠지? 그래도 힘들었던 시절, 레이와 함께 보낸 추억을 이길 차는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거 같다. 그러니 레이는 나의 드림카로 오래 남을 것이다. 언젠가 또 만나자, 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