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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윱맹 Oct 19. 2024

남편의 첫 전신마취

죽음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실명의 공포 (1)

망막박리, 녹내장, 백내장, 당뇨망막병증 등 실명의 위험이 있다는 이 병들은 각기 다른 병이지만 줄줄이 소시지처럼 연속해서 찾아올 확률이 높다. 내 남편이 그러했다. 남편은 꽤 오래 방치한 당뇨 때문에 온갖 병을 동시에 얻었다. 아마 순차적으로 생겼겠지만 결과를 한꺼번에 받았으니 나에겐 한 번에 찾아온 병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2024년 설날에 맞춰 안과 수술일정을 잡았다. 남편은 그 와중에도 최대한 휴가를 덜 내고 곧바로 회사에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 판국에 무슨 회사? 아주 나만 긴장되고 걱정돼서 난리지 뭐.' 나는 남편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 아닐까 심히 걱정이 되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위해 남편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떴는데 앞이 안 보이면 어쩌지?'란 걱정이 매일 되는 거야. '그럼 그땐 삶을 포기해야겠다' 이런 생각까지 들더라고."


"그럼 나는 어떡하고?"


"그래서 결혼생활 내내 보험 잘 들어놨잖아."


실제로 나는 필수라고 부르는 최소한의 보험만 있었다면 남편은 나보다 2배나 많은 보험에 가입을 했다. 나는 바란 적도 부탁한 적도 없었는데 본인이 스스로를 믿지 못해 열심히 보험을 든 것이다. 남편은 가끔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바라보곤 했다. 나는 평소 겁이 많아 병원, 어둠, 물 등 무서워하는 게 참 많았다. 그리고 남편 피셜로,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새로 사귄 인연에 상처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남편은 항상 나를 걱정했다.


"나 없으면 너 사람들한테 호구될 거 같은데···."


"나 없으면 너 치과에는 누구 손 잡고 갈래?"

(30대가 되고부터는 혼자서 치과에 잘 가고 있다)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 삶을 포기한다는 생각까지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2019년부터 지속된 눈과의 사투가 그렇게 남편의 희망을 갉아먹고 있었다.


2월 1일, 수술할 범위와 전신마취가 가능한지 체크하는 날

그간 코로나19 시기도 있었고 남편과 함께 대학병원 안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세상에는 얼마나 아픈 사람들이 많은 건지 주차장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병원은 왜 이렇게 넓은지 남편이 아니었다면 안과를 찾아가는 것부터가 일이었을 거다. 도착하면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착확인을 하고 예진실을 가고 검사실을 가고 안압 정밀검사까지 받은 후에야 교수님을 만나러 갈 수 있다. 망막질환계 꽤 유명한 분이니만큼 대기실은 앉을자리 하나 없이 환자들로 붐볐다. 30분 대기 정도는 감사하다고 해야 할 수준이었다.


남편은 말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교수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친정부모님 앞에서도 능청스러운 사람이? 정말 드물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교수님은 미룰 만큼 미룬 거 같다며 수술을 하자고 했다. 좌안에 가스를 주입하는 유리체 절제술과 백내장 단초점 렌즈 삽입, 레이저 광응고술을 함께 받기로 했다. 그리고 전신마취가 가능할지 다른 과에 협진을 받기로 했다. 부분마취로도 받을 수 있는 수술이었지만 남편은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며 그간 없던 폐소공포증이 생겼다. 마스크를 쓰고 그 위에 수술포를 덮은 후 시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과호흡이 와서 큰 일을 겪을 뻔했다.


신장내과와 마취통증의학과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 최근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지를 제출했는데, 신장수치가 안 좋아 재검사를 받게 되었다. 아무래도 오랜기간 약을 복용하다 보니 신장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한 수치로 통과를 했다. 마취통증의학과에서도 짧은 상담을 마치고 전신마취 허가를 받았다. 모든 검사를 끝낸 후 시계를 보니 6시간이 지나있었다. 나는 너무 허기가 져서 뭐라도 먹고 싶었지만 남편은 이날부터 '배가 안 고파서'라는 말을 매일 되풀이했다.


2월 6일, 입원을 했다

입원 당일 오전, 병원에서 입원 관련 전화가 왔다. 오후 3시 이후로 입실이 가능하고 5인실 병동에 묵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2박3일 입원은 처음이라 뭘 챙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집에 와서 씻고 자면 되니까. 오빠 세면도구랑 못 씻을 때 쓸 모자 정도?"


여행용 가방을 챙긴 게 무색할 정도로 뭐가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밤마다 집에 돌아갈 생각을 했다. 예전 녹내장 수술 때 보호자가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지하철을 이용해서 병원에 도착을 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병실이 부족해서 어린이 병동으로 배정이 되었다고 했다. 남편이 팔에 찬 환자팔찌에 '어린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그때까진 둘이서 시시덕거리며 마냥 웃었다. 나는 보호자식도 신청하지 않았다. 남편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다음부터 조용해졌다. 수술 전 마지막 식사라고 나온 병원밥이 당뇨식이라 그런지 너무 맛이 없어 보였다.


"수술 잘 끝내고 집 가서 우리끼리 명절음식 해먹자!"


"···."


병원이라면 이골이 나게 다녔던 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남편의 긴장한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걱정이 돼 9시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병원 전체가 소등되었다. 남편이 얼른 가서 고양이도 챙기고 내일 수술 후 먹을 수 있는 간단한 과일을 챙겨 와 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남편과 함께 왔던 길을 혼자 되돌아서 집으로 갔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남편이 연락을 했다.


[내일 오전 8시부터 수술대기 들어간다는데, 일찍 올 수 있겠어?]


내일은 차를 갖고 갈 요량이었다. 환자 앞으로 나오는 무료주차 시간이 있어서 차를 대놨다가 남편이 퇴원할 때 태워오려고 했다. 그럼 병원까지 차로는 1시간, 아침 6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 말이가 평소처럼 내 품에 붙어 있어서 안심이 되는 밤이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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