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우안은 제기능을 못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번 좌안 수술이 매우 중요했다. 한쪽 눈이라도 보여야 일상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남편이 존경하는 상사가 한 명 있는데, 그도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불편함을 이겨내고 이사라는 직책을 달았고 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4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내셨다. 지금은 업계에서 은퇴를 하셨지만 요식업 사장님이 되어 제2의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고 계시다. 남편은 종종 그분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 남편에게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건 견딜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양쪽 눈에 문제가 생기는 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2월 7일, 수술을 받았다
아침에 도착하니 병원 주차장이 매우 한산했다. 나는 남편의 이동동선을 고려해 찾기 쉽고 타기 편한 곳에 차를 댔다. 병실에는 남편과 비슷한 병명의 성인환자가 4명이나 있었다. 바로 옆침대에 우리처럼 남편이 입원을 하고 아내가 곁을 지키는 부부도 나란히 있었다. 그분은 눈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수술을 하러 가는 우리와 달리 조직검사를 하러 온 사람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아내분이 불편한 보조침대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게 보였다. 고요한 아침의 풍경이었다.
남편은 전날 밤부터 링거를 맞기 시작했다. 오전 8시부터 수술대기라 들었지만 10시가 넘어서야 수술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장신구랑 양말, 속옷까지 다 탈의해 주세요."
팔을 움직이기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목걸이와 속옷, 양말 탈의를 도왔다. 어린이병동에서 안과병원까지는 거리가 꽤 멀어서 휠체어 이동을 도와주시는 직원분이 오셨다. 남편이 휠체어에 옮겨 앉고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일반인은 입장이 불가한 직원 통로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더니 곧이어 안과병원이 나왔다. 하루에 수많은 사람의 휠체어를 끌어주는 직원답게 매우 프로페셔널했지만 표정만큼은 무미건조해 보였다. 수술실 앞에 도착하니 여기서부터 나는 입장할 수 없다고 했다. 휠체어 위 등이 굽은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 잘하고 와. 나 수술대기실에서 기다릴게."
간호사분이 남편의 수술은 1시간 정도면끝날 거라고 했다. 나는 11시 반이 되어서야 첫 끼를 해결하기 위해 병동을 나섰다.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긴 했는데 그때 식사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을 수술실에 보내고 나서야 모든 게 실감이 났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수술대기실로 돌아갔다. 1시간이면 된다던 수술이 2시간이 지나도 끝나질 않았다. 전광판에 '수술대기' 표시를 보고 밥을 먹으러 갔었다. 그리고 30분 뒤에 돌아오니 '수술중'이 되어있었고 그 후 오랜시간 그 표기가 바뀌지 않았다.
"어차피 환자분 수술 끝나면 다른 경로로 병실까지 이동할 거라 여기서 보실 수 없어요. 그냥 병실에서 기다리시는 게 나을 거예요."
초조해하는 나에게 간호사분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병실로 돌아가니 보조침대에 혼자 앉아있는 옆병상의 아내분이 보였다. 나도 내 보조침대에 앉았다. 그분과 나의 보조침대는 거의 붙어있듯 가깝게 설치되어 있었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때 등 뒤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침 내내 덤덤해 보이던 옆병상의 아내분이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은 전염되어 내 눈에서도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남편보다 옆병상 남편분이 더 빨리 도착을 했다. 눈 안에 있는 조직을 떼낸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 아내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간병인의 모드로 돌아갔다.
오전 11시에 헤어졌던 남편은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병실로 돌아왔다. 병상에 실려온 남편은 마취에서 깨어나고 있는지 고통에 신음하기 시작했다. 수술시간이 길어졌던 것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남편이 알던 수술내용과 달라 추가로 설명을 들었고, 전신마취라 마취 전후로 경과를 본다고 시간이 더 걸렸다고 했다. 간호사분이 주의해야 할 사항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제부터 남편은 고개를 들지도 바로 눕지도 못하게 되었다. 눈 안에 가스를 채워놓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도저히 못 참겠다며 무통주사를 요구했다. 진통제에 무통주사까지 맞았지만 남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후 5시가 지나서 담당 교수님이 오셨다. 남편이 겨우 몸을 일으켰는데 그러면서 토를 하기 시작했다. 먹은 것도 없어서 흰색의 침 같은 거품토가 계속 나왔다. 교수님의 회진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와중에도 검진은 계속되었다. 나는 남편의 턱 밑에 휴지통을 받치고 안절부절못하며 서있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망막이 붙지 않으면 또 이 끔찍한 수술을 반복해야 했다. 교수님이 떠나고부터 나는 안약 넣기 레이스를 시작했다. 2시간마다, 4시간마다 넣는 소염제와 항생제 안약이 내 손에 주어졌다. 처음 안약을 넣기 위해 남편의 안대를 떼는데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수술 직후 안약을 넣는 고통이란 아마 난 평생 알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안약을 넣을 때마다 남편이 아파할 때마다 누가 심장에 바늘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남편이 수술 후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좌안은 가스가 빠질 때까지 볼 수 없다고 했고, 우안은 애당초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당연히 '수술한 눈은 당분간 계속 안 보여요.'라고 말했고, 남편의 우안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순간부터 남편은 정해진 기간이 없는 앞이 안 보이는 생활을 해나가야 했다. 간호사분이 전신마취 후에는 소변과 대변을 보는 게 중요하다며 보면 바로 알려달라고 했다. 지금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운데 화장실? 남편은 저녁밥도 삼키지 못해 내가 싸 온 방울토마토를 반강제로 몇 알 먹었다. 그렇게 겨우 저녁약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퇴원할 때까지 방울토마토와 블루베리가 남편의 주식이 되었다.
시간마다 소변, 대변을 체크하러 오는 간호사분 때문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어느덧 밤이 찾아왔고 남편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일단 화장실에 한 번 가보겠다고 했다. 링거를 꼽은 남편이 고개를 숙인 채로 일어났다. 처음 눈앞이 안 보이는 걸 실감한 남편은 한 발자국을 떼는 것조차 망설였다. 남편의 모든 움직임이 내 손 안에 달렸다.
"오빠 소변..? 대변..?"
소변이면 변기에 눌 수 있게 몸을 움직여줘야 했고, 대변이면 변기 위에 앉혀야 했다. 남편이 혼자서 해보겠다며 벽을 더듬거렸다. 나도 그 마음이 뭔지 알 거 같아서 차마 말리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소변과 대변까지 내가 화장실 안에 동행해서야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다. 한 순간 거대한 아이가 생긴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해서 짐을 하나도 챙겨 오지 않았다. 보조침대는 있지만 보호자 침구는 알아서 챙겨 와야 했다. 남편이 혼자 있어보겠다고 했지만 당장 넣는 안약조차 내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나는 다음 안약을 넣는 시간까지 2시간 내로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린이병동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아이고, 아이가 아프신가 봐요?"
내 목에 있는 보호자 목걸이를 보더니 기사님이 물었다. 그날 하루가 너무 길고 힘들었던 터라 말할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고 예의상 웃음을 지어냈다. 그리고 더는 기사님도 말을 걸지 않았다. 서강대교를 지나는데 형형색색, 서울의 밤풍경은 언제 봐도 황홀했다. 한때 이 풍경에 홀려 한 순간 서울에 취직을 결정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하고, 이곳에서 터를 잡았다.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울에서 잘 살아냈다는 뿌듯함이 때론 날 기쁘게 만들기도 외롭게 만들기도 했다.
집에 도착했더니 바닥이 얼음장이었다. 말이가 침대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확인해 보니 보일러가 먹통이었다. 이 집에 5년을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내일 남편과 퇴원해서 집에 오면 저녁이 될 거였다. 그럼 곧바로 설날연휴. 보일러는 또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막막했다. 남편이었다면 알아서 척척 해결했을 텐데, 추운 집에 혼자 남을 말이에게도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남편이었다. 나는 담요와 세면도구만 챙겨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시간, 4시간 알람을 맞춰두고 밤새 일어나 안약을 넣었다. 아침에 간호사분이 그걸 보더니 '아, 자는 중에는 안 넣어도 되는데'라고 얘기를 했다. 초보 간병인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