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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윱맹 Oct 21. 2024

어설픈 인간 내비게이션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서울에 지내면서 부산에서 열릴 결혼식을 준비하다 보니 여러모로 정말 힘들었다. 그 바쁜 와중에 남편이 나 몰래 항공사에 이벤트를 신청했다. 기내 안에서 깜짝으로 케이크를 받을 수 있는 허니문 이벤트였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륙 후 승무원이 다가와 '윱맹님 맞으시죠?'라고 물어본 기억은 어렴풋이 나는데, 그 직후 나는 다시 기절하듯 잠을 잤다. 눈을 뜨려고 노력해도 눈이 감기는, 마치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일본을 경유해서 하와이까지 가는 일정이었다. 경유지에 내리자마자 라운지로 들어갔고 거기서는 케이크를 꺼낼 수가 없었다. 환승하기 위해 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 케이크와 함께 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서 인증샷을 남겼다. 그렇게 케이크는 보안 검색대 직원분에게 넘어갔다. 남편은 가끔 이 이야기를 어이가 없었다며 꺼내곤 했다. 내 평생 하늘에서 케이크를 받아보는 일이 또 있을까?  


나는 하와이에 도착해서야 기운을 차렸다. 커플옷을 야무지게 챙겨 입고 투어버스에 올랐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를 하와이, 뽕 뽑을 만큼 놀아야지 다짐했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하루에 2만보 이상씩 걸으며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스노클링도 하고 오픈카도 타보고 섬투어까지 하며 로맨스 영화 한 편을 찍었다. 한창 놀던 그때, 남편이 눈앞에 아지랑이 같은 게 보인다고 말했다. 아직도 생생한 와이키키 해변을 걷던 순간이었다. 스노클링을 하면서 눈에 바닷물이 들어갔나? 오픈카를 타면서 바람을 많이 맞았나? 나도 비염이 있어서 가끔 눈을 세게 비비는데 그럴 때마다 종종 그런 현상을 겪곤 했었다. 그냥 일시적인 증상일 거라며, 우리는 당뇨가 준 마지막 경고를 그렇게 무시했다.




2월 8일, 퇴원을 했다

수술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도 찰나, 남편은 고개를 들지 못하면서 또 다른 불편과 마주했다. 나는 평소 안마를 해주는데 소질이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도 마사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게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망막박리 수술을 한 환자에게 보호자가 실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 안마라는데···. 남편의 목과 어깨를 주무르면서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도 남편은 지금 이 서툰 손길마저 간절해 보였다.


수술한 환자들은 교수님의 외래진료 시간에 맞춰 첫 번째로 진찰을 받을 수 있다. 아침 8시부터 휠체어 도우미분과 함께 안과병동으로 넘어갔다. 교수님이 고개를 약간 숙이는 게 아닌 배꼽을 보듯 숙여서 앉아있으라고 했다. 아니면 엎드려서 눕기 & 수술받은 눈을 위로해서 옆으로 눕기. 뭐가 됐든 편한 자세는 아니었다. 가스가 빠지고 망막이 붙을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그게 언제인지는 교수님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남편의 눈은 약해진 혈관으로 가득했어서 수술을 받으면서 핏줄이 많이 터졌다고 했다. 그 고인 피들을 당장 처치하기도 어려웠다. 일주일 뒤 외래를 잡고 그 사이 자연흡수가 되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진료를 본 후 바로 퇴원을 하면 좋았을 텐데, 남편에게는 한 명의 담당 교수님이 더 있었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우안의 추적검사를 맡아주고 계신 녹내장 교수님도 만나야 했다. 대학병원은 참 시간을 잡는 게 힘들다. 오후 1시에 외래를 잡고 나니 그 사이 공백시간이 꽤 길었다. 우리가 신청한 환자식은 아침이 끝이었다. 간호사분이 점심식사를 추가해 줄지 물어봤지만 남편은 병원밥을 더는 먹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라도 밥을 먹고 오라고 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편 앞에서 밥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우리는 내가 챙겨 온 비상식량을 나눠먹으면서 오전을 버텼다.


오후까지 기다린 시간이 무색하게도 교수님과의 만남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아직도 우안을 재수술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지금 좌안을 수술한 마당에 우안에 대한 얘기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다시 병실로 돌아와서 퇴원준비를 했다. 주의사항을 듣고 약이 조제되는 걸 기다리고, 또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렇게 3시가 넘어서야 병실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누구.. 주차장까지 안 데려다주시나요···?


남편을 사복으로 갈아입히긴 했는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각 병동마다 배정된 휠체어가 따로 있다고 해서 어린이병동의 휠체어를 빌리지 못했다. 다른 방법을 찾는 것도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막막했다. 퇴원을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치료가 끝난 환자로 분류가 되어있었다. 일단 느리게, 안전하게 차까지 가는 게 목표였다. 걷기도 하고 안대도 한쪽 눈에만 차고 있다 보니 얼핏 보기에 남편은 멀쩡해보였다.


설연휴를 앞둔 대학병원은 사람들로 더욱 붐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한 대를 보내고 다시 기다렸지만 엘리베이터 안은 여전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어떻게든 타야 했다. 내가 먼저 타서 공간을 확보한 후 남편을 그쪽으로 잡아당겼다. 상황을 모르는 남편이 바짝 긴장을 했다. 내리는 사람이 생기면 내렸다가 다시 타고 그러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 짧은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한 여름날처럼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주차장에 겨우 도착을 했다. 차를 가까이 대놓긴 했지만 그 거리조차 멀어 보였다. 아까는 없어서 문제였던 휠체어가 주차장 입구에 방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휠체어는 지나가는데 거슬리는 방해물에 불과했다. 안전을 위해 촘촘하게 설치된 방지턱을 지나칠 때마다 남편이 발에 걸려 넘어지진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주차하기 위해 오가는 차들도 위험요소였다. 나는 인간 내비게이션 그 자체였다.


걸음 앞에 발등 높이의 방지턱, 전방에 차량 한 대, 차량 사이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우회전


이 어설픈 인간 내비게이션과 함께한 남편 또한 땀범벅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차에 도착을 했다. 조수석 문을 열어 남편을 태우는데, 소개팅한 날 남편이 날 위해 차문을 열어주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차문을 열어주다니, 감회가 남달랐다. 드디어 병원을 빠져나왔다. 출퇴근 시간은 아니었지만 명절을 앞두고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막히는 구간이 많아 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남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토가 나올 거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고개를 숙인 채로 차에 있다 보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날, 우린 창문을 모두 열고 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도착한 우리를 맞이한 건 고장 난 보일러와 추위를 피해 이불속에 숨어있는 고양이였다. 나는 서둘러 보일러 수리를 신청했다. 감사하게도 보일러 기사님이 연휴에도 일을 하신다고 했다. 오늘 추위만 버티면 된다. 그 사이 남편은 벽을 짚으며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름의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내 걱정과 달리 남편은 혼자서 화장실 사용까지 척척 해냈다. 덕분에 나는 밀린 집안일을 하고 고양이를 돌보고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남편의 안약 넣기 레이스를 이어갔다. 하루 사이 먹는 약과 넣는 약이 더 늘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집에 온 후부터 남편이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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