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앞 약국거리까지는 큰 사거리를 건너야 했다. 앞이 안 보이는 남편을 데리고 가긴 힘든 거리였다. 병원 1층 카페에 남편을 앉혀놓았다. 음료를 시켜서 빨대도 꼽아주고 심심할까봐 휴대폰 영상도 틀어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카페를 나서는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운전을 하려고 편하게 패딩조끼를 입고 왔다. 일주일을 실내에서만 지냈더니 날씨에 대한 감이 떨어졌나 보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는 걸 기다리는데 손발이 달달 떨렸다. 약국거리에는 수많은 약국들이 모여 있다. 하지만 어느 한 곳도 사람이 없는 약국이 없었다. 얼마나 아픈 사람이 많다는 뜻일까? 남편이 나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대기번호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눈앞의 사물에 대한 조심성이 떨어진다. 반대로 눈앞 미지의 사물에 대한 두려움은 높아진다.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어두운 곳에 계단이 있으면 내려가기를 주저했다. 별거 아닌 계단에도 주춤하고 돌아가는 걸 보면서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평범한 길을 걷다가도 발을 헛디뎌서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대부분 보도블록이 깨져 있거나 비어있는 길에서 생기는 일이었다. 평범한 일상이 흔들린다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씩 깨달아갔다.
"저 언제부터 회사에 나갈 수 있을까요?"
수술 후 첫 외래에서 남편이 가장 먼저 한 질문이었다. 본인의 눈상태보다 회사를 언제 갈 수 있는지 묻는 사람이라니. 교수님 앞에서 내 얼굴이 다 달아올랐다. 저 철없는 남편 같으니라고! 교수님이 회사가 중요하냐며 화를 내셨다. 그리고 한 달 쉬는 걸 권고한다는 진단서를 작성해 주셨다. 이 대화가 오갈 때 남편의 눈에서는 실밥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실밥을 빼는 교수님과 진료를 받는 남편은 덤덤한데,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2월 20일, 재수술이 결정되었다
남편은 망막박리로 인한 유리체 절제술을 받았고, 눈에 가스를 채워 넣었다. 망막을 붙게 하기 위한 일종의 충전물이었다. 시야가 불편하고 고개도 숙이며 지내야 했지만 1번의 수술로 완쾌를 기대해 볼 수 있었다. 남편은 빠른 쾌유를 기대하며 12일 동안 아주 성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남편의 성실함과는 별개로 눈에 고인 피도 여전했고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재수술 판정을 받게 되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우리가 피하고 싶어 했던 오일을 주입하는 수술이었다. 오일의 경우에는 넣을 때도 제거할 때도 눈을 건드려야 하는데, 한 마디로 수술을 2번이나 더 받아야 했다. 한 번에 낫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가 이러니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2월 21일, 재수술을 받았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막 전공의 파업이 시작되면서 남편의 전신마취를 담당해 줄 의사선생님을 구하지 못했다. 교수님은 미루면 우리만 힘들어질 거라며 부분마취를 권유했다. 마스크라도 벗고 들어갈 수 없냐고 물었지만 안구의 위생문제로 불가했다. 다시 마스크 위에 수술포, 남편의 암담한 표정이 눈에 보였다. 나는 급한대로 청심환과 마스크 가드를 사 왔다. 숨이 멎을 거 같다는 그 공포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되길. 아내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너무나도 없었다. 남편은 그렇게 또 수술실로 들어갔다.
남편이 굶다 보니 이날도 오후까지 함께 빈속이었다. 전신마취로 수술을 받을 때보다 마음이 더 불안했다. 어김없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서방은 수술실 들어갔어?"
파업 때문에 전신마취가 안 된대. 청심환이랑 마스크 가드도 줬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 이번에는 부분마취라 수술시간은 1시간이면 된대. 지금 수술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 밥은?"
속사포처럼 남편 얘기를 뱉던 내게 엄마가 물었다. 너 밥은 먹었냐고. 그 목소리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혼자서는 편하게 밥을 못 먹겠어, 엄마."
너라도 기운을 차려야 한다며 엄마의 설득에 카페로 향했다. 빵 하나와 커피를 시켜 자리에 앉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번에는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에 대한 얘기보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갔다. 애써 밝은 척을 해보지만 서로가 어떤 심정일지 너무도 잘 알았다. 남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전보다 시댁이 편해졌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나의 노고를 알아주는 시부모님의 말이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우리는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2월 22일, 남편의 생일을 병원에서 보냈다
오일을 넣었으니 이제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눈도 곧 보일 테고 금방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다. 물론 망막박리가 완치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이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생일축하 카톡이 날아왔다. 남편에게 메시지를읽어주었다. 라디오 디제이가 된 기분이었다. 평소 남편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이 수많은 연락들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곧 눈앞이 보일 거라는 소식에 남편이 환호했다. 그 어떤 생일선물보다 기뻐했다. 진료실을 나서는데 그 답답했던 병원이 얼마나 상쾌하던지. 오후외래까지 남은 시간 동안 뭘 할지 고민했다. 남편이 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체인점 쌀국수 가게에 앉아 기본 쌀국수와 볶음밥을 먹었다. 병원에서 맛집을 기대하는 것도 웃기지만 아주 흔한 맛이었다. 그런데 그 흔한 맛이 그렇게 반갑고 맛있었다. 남편이 먼저 뭘 먹자고 제안한 것도, 둘이서 외식을 하는 것도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차에서 낮잠도 잤다.
아, 평범한 일상을 흔들려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구나.
남편의 건강만 돌아온다면 더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겠다. 낮잠을 자면서 그런 다짐을 해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