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이벤트를 열었다. 남편이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아이가 있는 이웃들의 집에 방문했다. 부모가 아이의 선물을 미리 주면 산타가 된 남편이 그 선물을 아이들에게 건네주는 방식이었다. 이벤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풍선공예가 취미인 남편은 터널, 칼, 꽃 등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옷 입은 게 아깝다며 자녀가 있는 지인들에게도 영상통화를 걸어 기꺼이 산타가 되어주었다. 이걸 2년이나 했다. 그만큼 남편은 아이들을 참 좋아했다.
"너는 좋겠어. 남편이 애들을 저렇게나 좋아하고. 나중에 내 아이 생기면 얼마나 더 잘하겠어!"
이웃과 지인들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그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남편이 아이를 몹시 좋아한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나도 아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이를 낳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섹스리스 부부가 된 지 어느덧 7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연애 때부터 남편은 여느 남자들과는 달랐다. 수차례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더니 정작 연애를 시작한 후에는 얌전했다. '어장 안에 물고기' 같은 게 아니라 굳이 따지자면 '너무 소중해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20대, 피 끓는 청춘일 때 만나지 않았나. 24살의 나는 정신적 교류 이상으로 육체적 교류가 중요했다. 누가 먼저면 어때. 나는 남편에게 끈질기게 접촉했다. 그때부터 남편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영상을 보고 친구와 대화를 통해 성지식을 쌓아갔다. 그 결과 남편의 원인 모를 발기부전은 나에 대한 사랑의 척도가 되었다. 우리가 정상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건 남편이 그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고민을 친구와는 나눌지언정 정작 남편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떡하지? 두려웠다. 대신 부부관계에 실패할 때마다 남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점점 시도조차 하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우리의 신혼생활 모습이었다.
결혼 2년 차 때 폭탄이 터졌다. 남편의 당뇨진단이었다. 이미 눈도 발도 성기능도 고장 난 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속은 시원했다. 이유도 모른 채 아픈 걸 지켜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아직 젊으니까, 지금부터 관리하면 금방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가장 급한 눈부터 치료를 시작했는데 눈 깜짝할 새 5년이 흘렀다. 남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우리부부에게 성생활은 더는 화두가 되지 못했다.
올해 상반기가 지나서야 건강에 뜬 적신호가 소등되었다. 아직 청신호까진 아니지만 황신호쯤은 온 거 같다. 그간 서로 속에만 담아두었던 얘기를 꺼낼 여유도 생겼다. 그게 바로 임신문제였다. 26살에 결혼을 했는데 내 나이도 벌써 33살이 되었다. 노산을 걱정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 먹으면 임신 정도야 뭐. 초반에는 그런 자신감도 있었던 거 같다. 그렇게 결혼 8년 차가 되어서야 임신준비를 시작했다.
남편이 비뇨기과를 방문했다. 당뇨 합병증에 대한 상담을 하고 약을 받아왔다. 흔히 알고 있는 비아그라 계열의 약이었다. 관계를 갖기 30분 전에 먹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 잠시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노력을 해봐도 반응이 없었다. 대신 신체 다른 곳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남편의 얼굴이 뜨거워지더니 곧이어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그 후 몇 번을 더 시도해 봤지만 이러다 남편이 못 버티겠다 싶을 정도로 부작용이 컸다.결국 약 복용을 중단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기능을 개선시켜 준다는 디바이스를 구매했다. 카xxx라는 제품인데 20만 원이 훌쩍 넘었다. 광고일지 몰라도 개선되었다는 리뷰가 꽤 많았다. 다른 것보다 사용방법이 간편해서 좋았다. 자기 전 휴대폰을 보는 시간에 15분만 착용하면 되었다. 그 디바이스를 사용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미세한 효과는 있었을지 몰라도 특별한 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사실 난임병원을 방문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럼에도 주춤하고 있는 건 아이만 가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냐는 거였다. 평생 섹스리스 부부로 살아가도 괜찮냐는 게 원초적인 고민이었다. 남편은 그래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지금은 괜찮아도 평생이라 생각하니 암담했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건 다르다. 훗날 이 문제가 우리부부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남편을 설득하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지도 또 두 달이 흘렀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섹스리스 부부들 중 우리가 가장 사이좋은 부부일 거라고. 오늘도 우리는 모닝뽀뽀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