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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맹 Oct 25. 2024

더는 못할 게 없어

남편에게 꽤 많은 돈을 받았다. 현재 집안 경제권은 나에게 있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돈이라니? 보험을 여러 개 들어놓은 덕분에 병원비를 처리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했다. 일종의 수술위로금 같은 거였다. 나는 집안 경제권을 갖고 있지만 고정수입 외의 돈은 남편이 자유롭게 쓰도록 두고 있었다. 가령, 일회성 알바나 중고거래를 통해서 버는 돈 등이다. 병원비로 집안 경제가 흔들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러니 수술위로금은 위로가 필요한 남편이 갖는 게 마땅했다.


"그간 무보수로 병간호도 하고 운전기사 노릇도 했잖아. 명품 사주려다 그거 주면 환불한다고 난리 날 거 같아서 현금으로 가져왔어."


어느덧 남편은 부모, 친구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2022년에 나는 첫 명품, 구찌에서 가방을 샀다. 그것도 남편이 어디 행사에 참석할 때만 들어도 좋으니 제발 하나만 갖고 있어 달라며 사정을 해서 구매를 했었다. 거의 들지도 않는데 케이스와 함께 보관하면서 공간만 축내고 있는, 나에게 명품은 없는 게 편한 존재다. 나를 잘 아는 남편 덕에 쉬면서 얇아졌던 통장이 다시 두둑하게 채워졌다. 올해 글을 써봐도 좋겠다. 이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3개월 뒤 예정대로 오일을 제거하면서 좌안과의 기싸움도 끝이 났다. 5개월의 투병 생활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 사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나도 모를 사이 봄도 지나갔다. 그리고 역대급 습했던 여름이 찾아왔다. 작년에 갱신하지 못한 남편의 면허증을 발급받으러 갔다. 스무살 때부터 운전을 시작해서 누구보다 운전부심이 있던 남편은 1종 갱신에 실패했다. 시력 때문이었다.


"어차피 1종 쓸모도 없었어."


씁쓸해 보이는 남편에게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내가 1종을 따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반년 동안 병원과 남편직장을 오가면서 내가 오히려 운전부심이 생겨버렸다. 이날부로 나는 남편의 운전기사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이로써 확실한 백수가 되었다. 남편을 현관까지만 배웅하고 거실에 앉는데 온 집안이 고요했다. 익숙한 공간에서 경험한 낯섦이었다.


그 사이 남편의 몸무게가 8kg이나 줄었다. 병간호를 하면서 결혼생활 중 가장 많은 요리를 했다. 주변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살이 이렇게 빠졌어'라고 할 때마다 괜히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이 안 보이니 식욕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강제 다이어트의 결과로 건강검진 수치가 전보다 좋아졌다. 복용하던 약의 용량을 조금 줄였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한 번 맛본 희망은 모든 게 가능할 거란 믿음을 심어주었다.


남편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한창 외모를 가꾸는 일에 빠져있다. 요즘 수염 제모도 받고 나도 안 해본 보톡스도 맞았다. 내 고데기를 가져가더니 아침마다 앞머리를 손질하고, 옷 입는 재미에 푹 빠져서는 집에서 종종 패션쇼를 열었다. 10년을 함께 했지만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남편이 아픈 동안 감사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퇴원하고 맞이한 외로웠던 설날에 명절음식을 싸들고 온 친구도 있었고, 재수술을 받으면서 지나간 남편의 생일날에 블루베리, 루테인, 견과류 등 수많은 건강선물이 집 앞으로 도착했다. 남편의 회사대표님은 완쾌할 때까지, 정해진 기간이 없는 유급휴가를 주시기도 했다. 또, 오일을 제거한 날 다시 며칠간 눈앞이 안 보였는데 마침 남편이 회사를 가야 했다. 그때 내가 건넨 약과 함께 며칠간 남편을 보필해 준 회사후배에게도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집에 병문안을 와준 여러 지인들까지. 고마운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반대로 양가 어른들께는 죄송했다. 어른들 건강을 걱정해도 모자랄 나이에 젊은 사람 건강을 걱정하게 만들었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꽤 오랫동안 시댁의 집성촌에 내려가지 못했다. 2022년에 시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로 시할머니도 급격하게 노쇠해지시면서 치매가 찾아왔다. 얼마 전 추석을 맞이해 시골을 방문했다. 드디어 건강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다.


"니는 누구고? 갸는 건강하나?"


시할머니는 오랜만에 본 우리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건강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묻고 계셨다. 우리가 누구인지 몇 번을 설명하고 나서야 시할머니가 안도의 눈물을 흘리셨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여.' 못 본 사이 시할머니는 거동까지 힘들어지셨다. 누운 채로 우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남편의 건강만 걱정하고 계셨다는 게 죄송할 뿐이었다. 그날 시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제 어떤 것도 못 해낼 게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참았던 말이 새어 나왔다.


"나 아기를 갖고 싶어."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금기시된 주제였다. 남편은 나보다도 더 2세를 간절하게 바랐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당뇨가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오랫동안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비뇨기과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친구, 가족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는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의 마음에 상처로도 남았다. 주눅 든 남편과 섣불리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나. 더는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것도, 숨기며 사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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