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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연 Mar 04. 2024

02. 이렇게 느슨하게

워킹맘의 숨 쉴 시간, 달리기

         

유자녀 직장인이 운동을 한다는 말은 때로 무겁기도 하다. 아이 볼 시간을 쪼개 운동을 한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내 시간이 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도 종종 "애는 언제 보고 운동은 언제 해?"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자녀의 나이는 워킹맘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첫째가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세 살 터울 남매는 엄마가 없어도 본인들만의 시간을 제법 즐기게 되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주말에 취미 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내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 아이들이 미취학 연령이었을 때에는 누군가의 돌봄 지원 없이 운동을 한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대학생 자녀를 둔 회사 여자 선배들 중에는 막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운동을 시작했다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간절했던 나는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엄마니까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짧은 순간이 더욱 필요했다.


그래서 5년 전 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회사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면 누구의 희생도 필요치 않고 아이들에게 미안할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대체로 방해받지 않고 계획대로 운동할 수 있었다. 아마도 비빌 언덕 없는 워킹맘에게는 회사 점심시간이 최선일 거다.       


실내 체육시설이 문 닫았던 팬데믹 기간에는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재택근무를 할 때라 주 2회 정도는 점심시간에 달릴 수 있었다. 달릴 때만큼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소박한 공백과 정겨운 침묵을 누릴 수 있었다. 물리적인 실체는 없어도 달리기는 나만의 여백이었고, 공간이었다.


재택이 중단되고부터는 주로 퇴근 전후와 주말을 이용하여 달렸고, 야근이 많은 때에는 몇 달 동안 달리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쉬는 것도 달리기의 일부분이고 멈추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내 목표는 마라톤 참가나 기록 향상 같은 성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내 삶을 더 잘 꾸려가기 위한 여정을 함께 하는 페이스 메이커와 같았다.

     

다시 실내 운동이 가능해진 후에는 주중 점심시간에 필라테스를 하고 주 2~3회 야외 달리기를 했다. 물론 회사 점심시간에 러닝머신을 뛰어도 좋았겠지만, 나는 야외 달리기에 익숙해져서인지 러닝머신에서는 조금이라도 뛰면 어지러웠다. 이런저런 안 되는 점들을 치우고 겨우 얻은 소중한 운동 조합이어서 그랬는지 시달리는 나날 가운데에서도 3년간 꾸준히 해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운동 습관이란,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시간을 견뎌내고 얻은 최적화 비율이다.

     

바람직하기로는 거리나 시간에 따른 구체적인 러닝 목표를 세우고, 달리는 시간을 딱 정해 삶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키는 게 좋다. 식사 후에 양치를 하는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달리기를 한다는 식으로 일과에 달리기를 끼워 넣는 게 정석이겠지만, 나는 그때 그때 되는 대로 달렸다.


원칙이 없었고, 새벽 달리기와 저녁 달리기 간 경계도 없었다. 새벽에 눈이 일찍 떠지면 새벽에 달리러 나갔다. 정시 퇴근하는 날에는 오후 4시쯤 고구마를 먹고 퇴근 직후 러닝을 했다. 아이들도 태권도장에서 8시가 넘어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달리지는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컨디션이 개운할지, 당장 오늘 야근을 할지는 모두 내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영역이었다. 나는 그저 틈만 나면 달릴 수 있게, 평소에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놓고, 건강식을 하고, 늦게까지 스마트폰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늘 준비된 몸을 유지한 채 어쩌면 마음만큼은 나만의 여백을 향해 늘 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숨 쉴 시간'과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의 비중도 그때그때 되는대로 조정했다. 우선순위도 없었고 전략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애는 언제 보고 달리기는 언제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시간 될 때, 되는대로 한다.” 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자고 하면 그걸 먼저 들어주려고 했다. 요리를 같이 하고, 산책도 같이 하다가 남는 시간에 러닝을 했다. 어떤 주말에는 러닝을 먼저 하고 낮잠도 잤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필요한 엄마와의 절대시간이 “대체적으로” 충족되는 선에서 내 시간을 가졌을 거다. 하루 단위로 보면 부족할지라도 큰 틀에서 적정한 추세만 이어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첫째가 중학생이 되는 지금, 돌아보니 그래서 지치지 않고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달리기도 엄마노릇도.

           

"모성을 수행하는 엄마이자 존재를 이행하는 자아라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조건 속에서 나는 분열했고 분투했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워킹맘은 이미 매 순간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있다. 그저 숨 쉴 곳 하나 만드는 의미만 있어도 좋으니, 달릴 때만큼은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달리기가 모든 엄마들의 분투 가운데 마음 뉘일 한자리 정도는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달리기의 여백 속에서 그저 자신을 내려놓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도 좋겠다. 이를테면 느슨하고 허술하게 달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서 존재의 무게가 엄마라는 이유로 덜어지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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