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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ul 여진 May 23. 2024

돈보다 중요했던 한 가지.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뜬금없이 오빠가 은진이에게 뭐가 갖고 싶으냐 물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바지가 스즈키 바지다. (멜빵바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스즈키 바지라고 말하고 왜 묻느냐 덧붙여 묻자 "니(네) 다음 달 생일 선물 사줄게"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머리털 나고 한 번도 생일 선물은커녕 "생일 축하한다" 말 한마디 들어본 적 없는데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생일 선물을 챙겨 준다고 하니 약속 꼭 지키라 신싱당부하고는 다음 달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생일이 됐음에도 깜깜무소식, 생일이 지난 다음 날도 조용해서 물으니 돈이 없단다. 그럼 애초에 말이라도 하지 말지 왜 기대하게 만드냐 짜증을 내고선 속상함을 혼자 삭여야 했다.

역국 한 번도 얻어먹지 못하는 생일에 뭘 기대했나 싶었다.


   몇 달 뒤,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학교 끝나고 왔더니 평상시에도 독기가 서려 있는 아버지 눈빛이 할머니와 오빠들을 쏘아보며 연신 욕을 해대고 있었다. 종종 있는 일이라 숨 죽이고 움직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동안 들어 본 내용은 엄마가 오빠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됐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친구가 선물을 줬다거나 친구가 샀는데 마음에 안 든다며 본인 가지라고 택도 때지 않은 새 옷이나 신발을 들고 들어오기도 하고, 친구들과 3박 4일로 서울에 여행 갔던 적도 있는데 그게 전부 엄마를 만나러 간 것이고 엄마가 사주거나 매달 오빠에게 10만 원씩 보낸 돈으로 샀던 거다.

10만 원은 은진이와 5만 원씩 나눠서 용돈 하라며 보낸 것이고, 그 돈은 꽤 몇 년이나 받고 있었는데 은진이는 그 용돈을 받아본 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아버지에게 들키고 나서 연락도 끊기고 더 이상 용돈을 받을 수 없게 되고서야 알게 됐다.


   자세한 내막은 당연히 오빠가 실토해서 따로 들은 거지만, 아버지의 분노로 인해 거의 한 달 동안 우리는 살 얼음판 걷는 기분으로 지내야 했다. 살기 가득한 눈빛을 가진 아버지의 주특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가거나 눈을 마주칠 때마다 독기 품은 눈빛으로 쏘아보는 것이다. 성인이 된 큰 오빠조차 아버지의 그런 눈빛을 보면 그냥 얼음이 된다. 가스라이팅의 대가이자 독설가의 대가인 아버지는 그렇게 엄마와의 교류를 다시금 끊어 버렸다.


    이때 일 때문일까, 다시는 엄마를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은진이는 중학교 때 머리를 감지 않아 늘 떡진 머리를 하고 다니면서도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는 늘 떡져 있고 비듬도 보이고 까만 피부에 깡 마른 몸에 입만 열면 거짓말한다고 대놓고 애들한테 욕을 먹던 그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 친구들이 매번 바뀌고 남자애들이 자길 너무 좋아한다는 피해망상에 빠진 말을 하곤 했고, 작은 거울을 항상 들여다보며 이미 떡진 머리를 계속 얇은 빗으로 쓸어 넘기고 자아도취에 빠진 모습을 보여줬다. 어쩌면 그게 그 아이의 큰 장점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쓰지 않는 그 아이의 모습이 은진이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 이야기 눈빛 행동 하나하나에 긴장하며 신경 쓰는 은진이의 눈엔 그 아이의 태도가 재수 없어 보여도 부러웠던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아이가 엄마와의 사건에 대해 듣고는 본인 엄마가 은진이의 양엄마가 되어 줄 수 있다며, 육성 회비를 주면 엄마에게 가져다주면서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보이스피싱이나 다름없고 얼토당토 안 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한 시간 넘게 설득하는 그 아이의 말에 덜컥 육성 회비를 건네어 버렸다.


   육성 회비를 학교에 내질 않았으니 당연히 집으로 연락이 갔고, 그 사이 그 친구에게 상황을 물으니 거의 설득을 끝낸 상황이라 말하며 한 번은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 아이가 사는 곳 역시 은진이가 사는 곳 보다 조금 나을 뿐 그다지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김치, 국물 한 가지, 김과 밥을 먹었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신기하게도 그날의 기억은 초록색 대문과, 그 대문을 보고 마당에 들어서는 장면, 어렴풋이 밥을 먹었던 기억 외엔 떠오르는 것이 없다. 마치 초등학교 4학년 기억이 통으로 사라진 것처럼 그 당시 겪은 일이 꽤나 충격적이라 기억들이 드문 드문 깨져 있다.


   그렇게 딱 한 번 그 집에 초대되어 그 아이의 엄마를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고 와서, 육성 회비를 학교에 내지 않은 탓에 발칵 뒤집어져 정황이 다 들어 났지만 결국 그 육성 회비는 돌려받지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어떻게 사건이 처리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머니, 아버지 큰 오빠에게 한 동안 쌍욕을 들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고 무지한 행동이었는데, 그 당시 은진이는 그만큼 '엄마의 존재'가 간절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엄마의 존재보다 '내 편'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평범하지 않은 가족 분위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은 오빠에게 쏠려 있는 사랑.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해도 작은 오빠는 용서가 됐으니까. 큰 오빠는 할머니 사랑을 받았으나 아버지에겐 좋은 대학 가서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사람으로만 여겨졌고, 은진이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으니 그저 '내 편'이 필요하단 생각에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은진이는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말이나 행동을 보이면 지나치게 상대방을 믿고 의지하는 버릇이 꽤 오래도록 이어졌다. 다행히 지금은 자신을 가장 먼저 신뢰하고 있지만 이따금씩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은 한다. 그때 그렇게 돈을 내어주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것이 그것이었을 테니까.


돈보다 중요한 것.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진심으로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존재' 그것이 은진이가 유일하게 욕심냈던 소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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