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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 Oct 28. 2024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리뷰

복수의 순환


    어쩐지 선뜻 보기 힘들어 미뤄두고 있던 영화,《복수는 나의 것》. 신하균 배우의 매력을 알게 되며 겸사겸사 용기를 내서(?) 보게 되었다. 근데 영화가 정말 기가 막히다. 내내 감탄하면서 봤다. 개인적으로 제일 최근에 본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아가씨》인데, 그 깔끔한 뒷맛에 방심하고 있던 마음의 기강을 잡아주는 듯한 영화였다. 여느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그랬듯 참 징글징글하다. 근데 이 징글징글한 맛에 중독되어 버린 것만 같다. 6~7년 전에 보고 박찬욱 감독 영화에 입문하게 됐던 《올드보이》를 볼 때 느꼈던 감정을 또다시 느끼는 기분이었다. 한국에 이렇게 창의적이고 신선하고 재밌는 영화가 있다고?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친절한 금자 씨》는 이전에 리뷰도 썼겠다, 열외로 두고, 《올드보이》와 간단히 비교를 해볼까 싶다. 일단 둘 다 박찬욱 감독의 젊은 패기가 느껴지는 작품인데, 전자는 그중에서도 열정 그리고 후자는 그중에서도 냉소가 배어있다. 《올드보이》가 터질듯한 감정의 1인칭 주인공 시점 같은 영화라면, 《복수는 나의 것》은 사건들에서 한걸음 물러난 전지적 작가 시점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초반에 공장에서 일하는 류(신하균)의 모습을 롱숏으로 잡는다든가, 후반에 동진(송강호)이 류에게 복수하러 강가에 끌고 들어갈 때 부감으로 잡는다든가 하는 것이 어쩐지 비극적인 인간 세상을 담담히 바라보는 신의 시점 같기도 했다. 형식의 측면에서는 《올드보이》에서는 독백이 있었다 하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청각장애인 류의 대사를 자막으로 보여주는 신선함을 보여준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는 내레이션이 있었다.) 동진이 본인의 딸 시신을 부검할 때는 괴로워하면서, 류의 누나 시신을 부검할 때는 하품을 하는 모습은 《올드보이》에서의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란 대사가 떠오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비정함을 바탕으로 깔고 가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매력이 뭔가 하면, 대사 등으로 직접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미장센으로 과하지 않고 사실적이고 자연스럽게 상황을 표현한다는 것. 이를테면 현장에서 일하는 류가 청각장애인이라 혼자 소음 속에서 귀마개를 끼지 않고 작업하고 있는 디테일. 혹은 착하고 상냥하지만 맹하고 수동적인 류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씬들. (류가 사는 맨션의 버려진 소파에 항상 앉아있는 노숙자 치매 할아버지가 2번 등장하는데, 그 할아버지를 항상 챙겨주는 것으로 묘사되는 류에게서 보이는 따뜻한 마음씨. 또 이 할아버지를 더 이상 챙겨주는 이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류가 도망친 사실을 선행해서 보여주는 것도 인상적. 차영미(배두나)와 나누는 권총 얘기에서는 류의 맹함, 섹스씬에서는 수동성을 짐작할 수 있음. 그리고 그런 류가 각성해서, 영화 내 표현을 빌리자면, "보통 잔인한 새끼가 아니"게 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줌.) 회사에서 해고당할 때는 서류에 찍기 위에 엄지에 묻힌 인주가 피처럼 보이는 것으로 류의 참담한 심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 씬 이후 공장에서의 류의 자리가 텅 비어 있음을 담담하게 포착한다. 이처럼 뭐랄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게 좋았다. 장기매매하러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역광으로 찍은 숏도 시각적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맨션의 창가에 걸터앉은 류의 너머로 산이 보이는 숏도 인물의 무력감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 뇌리에 새겨지는 미장센이었다. 자살한 누나의 모습에 목이 메인 류의 울음소리와 티브이에 흘러나오는 보노보노 영상에 나오는 목이 졸린 너구리의 모습이 겹쳐지는 씬도 기억에 남는다. 비극적인 상황과 그에 대비되는 코믹함이 함께 중첩되면서 일어나는 역설이 비극성을 심화시킨다.

 《복수는 나의 것》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함은, 의도치 않은 잘못된 선택과 실수들이 얽히고설켜 걷잡을 수 없이 파멸에 이른다는 점이다. 복수의 원인도 모두에게 있으며 복수의 영향도 모두에게 간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모두의 잘못이기도 하다. 누구의 탓도 하지 못하는 막막함과 먹먹함이 이 영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 한 가지로 규정하지 못할 복합적인 감정들이 영화를 입체적이게 만든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나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그렇지?"라고 묻던 동진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류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 그럼에도 가족이 죽었을 때의 아픔을 너도 알 것이라는 분노. 이렇게라도 책임을 묻고, 지고 싶은 마음. 결국 감정도 복수도 순환된다.

 영화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마냥 어둡고 진지하고 잔혹한 영화일 줄 알았다. 하지만 류의 누나가 자살하기 전까지, 모든 일들이 꼬여버리기 전까지는 중간중간 실소를 터트리게 하며 긴장을 완화시켜 준다. 그게 비록 블랙코미디라 할지라도. 이를테면 장기매매 사기를 당하고 돌아온 류가 멍청한 짓 했다고 차영미한테 털리는 씬에 흐르는 신명 나는 노랫가락. 혹은 납치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열심히 수화를 하며 설명하는 차영미의 몸짓의 반동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류가 맹한 표정으로 통통통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은 웃음을 유발한다. 류와 차영미의 케미, 혹은 납치한 아이와 류 일행과의 케미가 보기 좋아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행복감은 가장 최고점이었을 때 나락으로 뚝 떨어진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어쩐지 《복수는 나의 것》이 《박쥐》를 제치고 내 최애 박찬욱 영화가 된 거 같기도 하다. 나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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