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말기 로마 제국엔 더 이상 부려먹을 노예가 없었다. 제국이 영토 확장을 멈췄을 때부터 전쟁 포로들은 생겨나지 않았고, 점차 줄어드는 노예 공급과 그에 따른 가격 상승은 노예들의 값싼 (한 번만 지불하면 됐다!) 노동력에 의존하던 대농장 (Latifundium)들로 하여금 경영전략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지주들은 이제 농장을 작은 구역들로 쪼개 자유민 농부들에게 빌려줬는데, 그 대가로 농부들은 연간 생산량의 절반을 지주들에게 납부해야 했으며 지주가 내야 하는 세금 일부도 자신들이 부담해야 했다. 이 소작농 (Colonus)들은 자유민 신분이긴 했으나 계약 기간 동안 땅에 묶여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없었고, 소작료와 각종 세금 등 의무를 지고 있었으므로 완전히 자유롭다 볼 수도 없었다.
중세에 와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와 형태에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자기보다 더 강한 자들에게 종속 (Dipendenza)된 채 살았다. 능력 있는 일부는 자발적인 충성 맹세나 복종 서약을 통해 강자와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소위 말하는 “명예로운” 관계 (Dipedenza onorabile; 주군과 기사의 관계와 같다)를 맺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부모가 물려준 빚이나 빌린 땅에서 오는 의무와 같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불공평한 계약에 묶여 일방적으로 착취당했다. 이들 반자유민 (Semi-liberi)들은 계약 조건의 완화를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올해 소작료를 감면받는 대가로 농한기 부역에 동원되는 식이었다. 개인의 자유는 더 이상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조각내 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재화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민 농부들의 노동 환경이 악화되는 동안 노예들의 처우는 점차 개선되었다. 교회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노예 해방을 “경건한 행동”이라 치켜세우며 장려했고, 노예들을 상대로 교리를 전파하고 그들을 개종시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내 노예들은 주인의 허가 아래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작은 농지를 맡아 일구며 마치 자유민 소작농처럼 살 수 있었다.
9세기부터는 힘 가진 이들에게 종속되기를 선택한 약자 (Pauperes)들의 수가 점점 늘어만 갔다. 카롤링거 제국은 정복전쟁을 벌여 막대한 수의 전쟁 포로를 포획, 그들 대부분을 아랍 노예상들에게 팔아버렸으며 (노예는 동방의 귀중품과 교환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특산품이었다), 일부는 내수 시장에 공급했는데, 그들은 주로 장원 (Curtis; 농업 기반의 대규모 자급자족 경제 단위) 관리용 농노로 사용되었다. 장원은 크게 영주 직할지 (Dominico)와 소작지 (Massaricia)로 구성되었는데, 직할지는 영주 개인 소유의 노예들이 관리하는 토지였으며 소작지는 말 그대로 자유민 농부들에게 빌려주던 땅이었다. 노예와 소작농 모두 연간 생산량의 일부를 납부해야 했음은 물론 역역 (Corvée; 무보수 강제 노동)의 의무도 졌는데, 대부분의 경우 노예에게 할당된 양이 더 많았다.
카롤루스 대제의 사후 제국이 분열되며 권력은 귀족들과 주교들의 손에 넘어갔다. 사회적 약자 (Pauperes; 자유민 빈민)와 노예를 구별하던 얇은 막은 그를 보증하던 공권력이 사라지자 따라 증발해 버렸으며, 이때부터 힘 있는 자들 앞에선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공평하게 착취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엔 사회 구조를 묘사하는 방법이 한 차례 크게 변화했는데, 초기 중세사람들은 (수많은 종속 관계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자유민과 노예 두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믿었다. 그러나 그 경계가 허물어진 뒤부터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맡은 역할에 따라 세 무리로 나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다.
작자 미상, [사제, 기사, 농부], 1300ca.
사제는 다른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기사는 다른 모든 이를 보호하며, 농부는 다른 모든 이를 먹여살린다. 이 삼분법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해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 계층이 독점했던 온갖 특혜와 권리들을 기독교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