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실례지만, 거... 어데 카씹니꺼?
중세 초기의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 강자와 약자 (Pauperes; 빈민. 단순히 가난한 이들만이 아니라 힘이 없어 착취당했던 모든 이들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이야기할 뿐, 그 안에서 또 성별에 따라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잘 다루지 않았는데, 이는 기록자들 중 절대 다수가 "강자", 즉 높은 사회적 지위 (귀족 또는 사제)를 가진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곧 사회의 근간이었던 시절, 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선 무기를 들어야 했던 시절에 전사들 (아버지, 남편, 아들)의 보호에 의존했던 여성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서도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알 수 있다. 도시가 형성되고 벽이 증축되며 공동묘지가 성당 주변으로 옮겨질 무렵에 만들어진 무덤들은 고인의 생전 "중요도"에 따라 그 위치를 달리했는데, 성당을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곳엔 2-40대 남자들이, 그 바깥에는 더 나이 든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가장 외곽엔 노인과 아이들이 묻혔다.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몇몇 로만-바바리안 왕국에서는 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여성일 경우 그녀의 나이에 따라 가해자의 처벌을 달리했는데, 이는 당시 여성의 가치가 생식 능력에 따라 달라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 개혁의 일환으로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이 신학적 해석을 등에 업고 "정당한" 멸시와 혐오로 변해 온 유럽에 퍼졌으며 뭇 문학 작품과 그림에서 여성은 육체 (영혼보다 열등한)와 비이성의 상징으로, 남성 (영혼과 이성의 상징)의 대척점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회 풍조는 성직자가 아님에도 자발적으로 성생활과 폭력에서 먼 삶을 추구하는 순결주의자 (Uomini Casti; 머리와 수염을 깨끗하게 밀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어 스스로의 선택을 알렸다)들을 대거 낳기도 했다. 교회는 또한 일부일처제, 근친상간 금지, 이혼과 재혼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에도) 금지 등을 전제로 하는 범국가적인 결혼 문화를 정착시키려 노력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여성들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몇 안 되는 권리 중 하나였음). 남편이 싸우러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아내는 과부가 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결혼할 때부터 아버지와 시댁으로부터 그들 재산의 일부분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부부가 모두 죽었을 경우 그 유산은 게르만족의 관습법에 따라 자식들 모두에게 (장자와 그 형제들, 적자와 서자, 아들과 딸의 구분 없이) 공평하게 분배되었는데, 이는 조상이 이룬 개인적 성공이 대를 이은 부의 축적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10세기 초부터 왕권이 약화되자 지금까지 왕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권력을 얻었던 귀족들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 자산을 쌓고 그를 다음 대로 물려줄 방법을 강구했는데, 사학자들이 가문의 형성 (Dinastizzazione)이라 부르는 이 과정에서 단 한 사람에게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주는 장자승계 전통이 생겨나게 된다.
한 가지 더, 우리가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 존재했던 왕가나 후작, 백작 가문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은 (예: 카롤링거 왕가) 사료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후대의 학자들이 그들을 분류하고자 만들어낸 이름들이다. 초기 중세엔 성이라는 개념이 희미했는데, 로마 제국의 엘리트들이 스스로를 칭할 때 사용하던 삼중 명명 체계 (이름-가문명-별명)는 점차 잊혀져 6세기에 이르러선 모두가 이름으로만 불렸다. 이 시기에는 이름의 다양성 또한 크게 줄어들었는데,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가문 창립자의 이름에서 약간의 변형만 (카롤루스, 카롤로만, 카롤...) 가해 부르곤 했다. 12세기부터 귀족들을 중심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해 곧 아래 계층 사람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여성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성을 가지지 못한 채 다른 남자와의 관계 (토마스의 딸, 베드로의 아내)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