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 화살, 창과 방패
고대 말기, "야만족의 침략"이 한창이던 시절 로마 제국군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로 전락했다. 그전까지 엄청난 규모의 군단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제국이 매년 2억 냥이 넘는 은화 (연간 세수의 20% 정도)를 병사들의 봉급, 식량, 무기와 방어구를 비롯한 소비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데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행정 체계가 무너지고 제반시설 (길, 항구, 농장)들이 버려진 뒤부터 중앙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군단들은 자연스레 조직력을 잃고 와해된다. 이후 제국령에 생겨난 로만-바바리안 왕국의 지도자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동전 대신 땅을 통해 (초창기에는 임대, 이후에는 소유권을 하사했다) 전사들을 다독이고 군대를 유지했다. 북방 민족들은 전쟁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고 부를 쌓을 수 있었는데, 왕국들이 세워지고 나서도 이 전도유망한 사업 모델 (약탈)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그들 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남았다. 로만-바바리안 왕국의 엘리트들은 무력을 숭상했으며 게르만 세계의 전통과 로마의 법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는 점에서 기존 제국의 엘리트층 (의회 소속 귀족들)과 차이를 보였다.
8세기 중반까지 신체 건강한 자유민 남성이라면 누구에게나 (당장 왕 본인도 한 사람의 전사로써 전열에 나가 도끼를 휘둘렀다) 왕국군에서 복무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 제위 시절부턴 왕국군 내 일반인 비율이 점차 줄어들었으며 그 빈자리를 귀족들과 그들의 사병들이 채웠다. 기사 (Milites)라 불렸던 고도로 훈련된 기병들은 옛 왕국군보다 그 수는 적었을지언정 전투에서 빛을 발하는 전쟁 전문가들이었다. 중세 성기에 말을 타고 싸울 줄 안다는 것은 곧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는데, 오랜 기간 훈련을 받아야 했기에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어야 했으며 갑옷과 창, 말 등 기본적인 장비의 가격도 굉장히 비쌌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방 영주들과 소귀족들은 제일 먼저 영지를 군사화, 즉 방어 시설을 건설하고 군대를 조직했다. 이제 전쟁은 소수의 지배자들이 온 힘을 다해 휘두르는 대검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지방 영주, 소귀족, 주교)이 서로를 향해 쏘아대는 화살처럼 변했는데, 지역마다 작은 규모의 무력충돌 (일회성 약탈)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반면 도시나 요새를 대상으로 하는 공성전이나 탁 트인 들판에서의 전면전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으므로) 아주 드물었다. 소규모 병력이 짧은 시간 안에 맞붙는 단기전이 정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정예 병력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군대는 기병과 그들을 보조하는 보병의 조합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병과의 특성상 육성과 유지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인구수 500명의 작은 마을은 끽해야 한 다스 정도의 기병을 보유했다) 그 비율은 낮게 유지되었다.
1200년대부터 다시 한 명의 손에 군사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왕들은 전쟁을 통해 국가 권력을 형성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와 여러 제도가 변화했는데, 상비군이 편성되고 용병 고용이 일반화되며 (봉급을 줘야 했으므로) 화폐의 유통이 원활해지기도 했다. 전쟁은 또한 기술의 발전과 군대의 개편을 불러왔다. 석궁의 발명은 궁병들의 훈련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으며 등자의 발명은 기병들로 하여금 고삐를 잡지 않고도 말 위에서 균형을 쉬이 잡을 수 있도록 해 전투력을 배로 끌어올렸다 (손이 하나에서 둘이 된 셈이니). 원거리 공격 수단의 발달로 기사들은 기존의 사슬 갑옷 대신 (검날은 미끄러뜨렸으나 화살에는 맥없이 뚫렸다) 판금 갑옷을 입기 시작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으며 늘어난 무게로 인해 군마 선정 조건이 더 까다로워지는 결과만 낳았다. 이 돈 먹는 하마들은 대규모 전면전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으므로 (접근하기도 전에 고슴도치가 되곤 했다) 왕들은 곧 이들을 편제에서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보병 (하층민 출신 병사들, 이상적인 화살받이)을 더 채워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