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우면 지는 거야
현대 이탈리아어 사전은 Aristocrazia와 Nobilta’를 동의어로 취급하지만, 대부분의 중세학자들은 이 둘을 구별해 사용한다. 마르크 블로크는 저서 “봉건 사회”에서 아무 엘리트나 귀족 (Nobilta’)으로 정의될 순 없으며, 그렇게 불리기 위해선 다음 두 조건을 모두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1. 우월성을 보증하는 사회적 지위
2. 그 지위의 세습
다시 말해, 사회적 특권과 그 세습이 법으로 보장되어야만 진정한 귀족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블로크는 이러한 법적 귀족 (Nobilta’ di diritto)들은 12세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했으며, 그전까진 실질적 귀족 (Nobilta’ di fatto; 즉 Aristocrazia)들, 자기 소유의 땅과 군대로부터 권력을 얻었지만 그 지위를 법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던 "귀족"들이 사회를 지배했다고 전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있다. 중세 초기 엘리트들에 관한 기록에서 Nobilis라는 라틴어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의 법적 지위를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Nobilis는 Potentes (강자들), Proceres 또는 Primores (지도자들)와 같은 사회 지도층에 속한 이들을 꾸미는 말로, 그가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에 비해 얼마나 더 (또는 덜) 고귀했는지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고귀함의 격은 개인과 가족이 소유한 재산, 부모와 조상이 이룬 업적과 그에 따른 명성, 그리고 개인이 사회에서 맡은 역할 (관직)과 그 수행 능력 등의 요소에 의해 결정되었다. 계급 사회에서 엘리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나아가 드높이기 위한 (즉 더 고귀해지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했다. 공직을 얻고, 군사적 성공을 거둬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왕과 가까워지는 것 (Königsnahe)이 중요했다. 엘리트들이 왕가와 혈연 관계를 맺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이유였다. 초기 중세의 실질적 귀족 (Aristocrazia)들은 또한 교회에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납부하고 성당과 사설 수도원 (대부분 가문 소유의 기록 보관소로 사용되었다)을 건립했으며 약자들 (Pauperes)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신실함을 과시하곤 했는데, 그와 동시에 군대를 조직하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지역 사회를 장악, 자신들이 “보호”하는 약자들을 착취하며 힘을 키워나갔다.
카롤링거 제국이 붕괴하며 생겨난 세 왕국에서는 혈연 관계로 묶인 엘리트들과 실질적 귀족들이 오랜 시간 동안 지배력을 행사했다.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왕국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한 가문에서 대를 이어 주요 관직을 세습하며 권력을 쌓고, 하위 엘리트들과 종속 관계를 맺어 지지 기반을 확보해 이내 왕을 배출하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엘리트들은 자기 가문을 다른 가문들과 차별화하는 방법, 즉 왕가의 형성을 통해 스스로의 권위를 확립했으며, “고위 귀족”들 또한 스스로를 Princeps, 즉 가장 높은 귀족이라 칭하며 다른 귀족들과의 격의 차이를 강조했다. 이 시기에 장자승계의 원칙 또한 확립되었는데, 적장자 한 명이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되면서 찬밥 신세가 된 손아래 형제들은 부유한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거나 다른 영지로 향해 기사가 되는 등 제 살 길을 찾아 떠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