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고대 말기,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장거리 무역은 대부분 제국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지주들은 자기 땅에서 난 생산물 일부를 세금의 형태로 속주 총독에게 납부해야 했으며, 총독은 다시 이를 중앙으로, 로마로 보냈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서는 곡물이,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름과 어장 (Garum)이 촘촘히 연결된 도로망을 통해 수도까지 운송되었는데, 로마 시민들에게 매달 무료로 빵을 배급하며 사회 안정을 꾀하고 정치적 지지를 얻었던 제국의 수뇌부는 특히 곡물의 운송에 차질이 없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지역 상인들은 시스템에 기생하는 방법으로 경쟁력을 확보했다. 이들은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제국 선박에 자기 상품을 실을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엄청난 금액의 운송료와 거래 수수료를 절약, 경쟁자들보다 더 싼 값에 상품을 공급해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제국이 망해버리기 전까지는.
제국의 화폐 체계는 천천히 무너졌다. 로만-바바리안 왕들은 금화를 계속 주조했으나 그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았던 은화와 동화는 끝내 완전히 사라져 6세기에 와서는 서유럽 전체의 화폐 유통량이 바닥을 기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물물교환을 통해 거래했다) 지역 간 중장거리 무역 또한 자취를 감췄다. 유일한 예외는 동방 (비잔틴)과의 사치품 교역으로, 고위 사제들과 귀족들 (Aristocratici)의 꾸준한 수요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7세기 후반부터 상황이 점차 나아졌다. 단신왕 피핀의 명 아래 프랑크 왕국의 화폐 주조 시설들은 금화 주조를 중단하고 신은화 (Novus denarius)만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피핀은 일련의 개혁을 통해 1리브라 (Libra pondo; 로마인들의 무게 단위. 파운드의 어원)의 은으로 20 비잔틴 금화 (Solidus)의 가치와 맞먹는 240 프랑크 은화를 만드는 조폐 시스템을 확립했으며, 은화의 디자인을 통일하고 왕실 조폐국에서만 주조할 수 있도록 해 화폐의 품질 (즉 가치)을 보증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프랑크 은화는 서유럽의 기축통화로써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장원 시스템의 발달도 초기 중세 경제 성장에 이바지했다. 지주들은 왕의 인가 아래 자기 땅에 시장을 열고 그곳에서 이뤄지는 모든 거래에 수수료를 부과할 수 있었다. 이 시장들은 지주들의 배만 불린 것이 아니었다. 소작농들도 얼마 안 되는 잉여 생산물을 장터에 가지고 나와 필요한 물건들로 교환할 수 있었으며, 수도사들도 수도원 텃밭에서 기른 채소들을 팔러 오곤 했다. 유념해야 할 것은, 장원이 발달하지 않은 변경 지역에서는 여전히 소규모 지주들이 자급자족하며 살아갔으며 화폐 사용도 뜸했다는 사실이다. 9세기 말에는 카롤링거 제국이 내전에 휩싸이고, 바이킹의 침략과 은광의 고갈 등 악재가 겹치며 성장세가 잠시 주춤했지만, 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인구수는 계속해서 늘어났으며 이는 새로운 마을들 (즉 경제 활동의 중심)의 형성을 불러왔다.
12세기 중반부턴 유럽 경제의 규모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사학자들이 “상업 혁명”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다음 요소들의 연쇄반응으로 인해 일어났다;
1. 사회의 상업화: 사회 각계각층에서 개인 간 거래가 활발해지고 시장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 현상은 특히 잉글랜드에서 두드러졌는데, 12세기 말부터 잉글랜드 전역에 7일장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으며 13세기 초에 와선 누구나 몇 킬로미터만 걸으면 시장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아졌다.
2. 화폐 유통량 증가: 새로운 은광들이 발견-개발되며 은의 가격이 낮아졌다. 공권력의 약화로 지방 영주들과 주교들이 개인 화폐 주조소를 소유하고 프랑크 은화보다 은 함량이 적은 저질 화폐를 찍어냈는데, 이는 곧 화폐 가치의 하락 (인플레이션)을 불러왔지만 동시에 작은 규모의 거래에서도 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3. 지방 권력의 강화: 지주들은 자기에게 종속된 농부들에게 더 높은 소작료를 부과했으며 그중 일부를 반드시 은화로 지불하도록 강제했다. 농부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반드시 시장에 가서 잉여 생산물이나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팔아 돈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점점 더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엔 또한 지중해 네트워크가 부분적으로 복구되고 지역 간 중장거리 무역이 재개되며 플랑드르 산 모직품과 같은 고품질 특산품들이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게 된다. 상인들은 장거리 무역의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연합을 구성, 자본금도 같이 대고 수익도 같이 나눴다. 13세기 중반부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방직 사업이 발달했는데, 이는 북아프리카와의 무역이 활발해지며 질 좋은 양모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었던 덕이었다. 파리와 런던, 로마 등 주요 도시의 발전과 토스카나 상인들 (특히 피렌체 상인들)의 독과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