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쓴 이 소설은 기억상실에 걸린 기 롤랑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과거를 추적해 나가는 내용이다.
기억상실로 정체성과 삶의 자취를 빼앗긴 주인공은 자기를 알만한 사람들을 찾아가 증언을 듣고 사진을 얻어가며 잊어버린 기억의 퍼즐을 조금씩 맞춰간다. 그런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증언자들의 기억이 희미해져 정확하지 않았고 그들이 기억을 더듬으며 하는 말에는 그때의 감정이나 느낌이 없었다. 마치 신문 기사를 읽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오래된 창고를 정리하며 예전에 사용하던 필요도 없고 아무런 애착도 없는 잡동사니를 꺼내는 태도처럼 무덤덤했다. 그 기억이 생각나도 그만, 생각나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주인공인 기 롤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이름이 페드로라고 추정을 했을 때도, 자기의 연인이 드니즈였다는 걸 알았을 때도 머릿속에 지식으로만 저장이 되고 가슴으로 내려와 그때의 감정까지 되살리지는 못했다.
기 롤랑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자기의 과거를 계속 추적했지만 결국 자기가 누구였는지 추정만 하고 로마에 있는 자신의 옛 주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를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소설은 끝이 난다.
이 소설의 작가가 결론을 내리지 않고 독자들에게 여운을 남긴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주인공이 과거를 찾은 후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질지 혹은 과거를 찾지 못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할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의 자취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올 것이므로 끝나지 않은 소설의 결말도 원하는 바가 다를 것이다.
감정과 느낌이 없는 과거는 역사책을 읽는 것 같고 혹시 감정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 당시 실제 감정과는 다른 왜곡된 감정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찾은 과거가 오히려 정체성이 왜곡되어 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나의 어릴 적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들을 때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내 인생에도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과거 기억의 잔상이나 옛 사진에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어떤 감정이나 느낌도 없는 사람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가 주는 추억이나 그 시절 그리고 그때 사람들과의 즐거움이나 그리움은 빛이 바래는 사진처럼 희미해지거나 잊힐 것이다. 더불어서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의 기억들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예전에 철거되는 주택가의 빈집을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어느 한 집에서 버리고 간 물건 중에 사진이 많이 있었다. 가족사진, 여행 가서 찍은 사진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있었다. 그걸 버린 사람은 그 사진이 주는 삶의 자취를 마음속에서 잊고 싶었던 것 같다. 옛 사진 속에서 삶의 허무를 느낀 것인지, 추억을 회상하는 것이 더 이상 감흥을 주지 않아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이유의 중심에는 세월의 야속함이 있었을 것 같다.
지나가 버린 인생의 자취가 공허하고 허무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밤이 되면 어떤 상점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가리키는 이정표처럼 마음속에 다가온다.
가을날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있는 것처럼 쓸쓸하고 서글퍼지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