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약사회는 1년에 2회 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학술대회에서는 병원약사들의 연구성과, 최근 병원에서의 이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눕니다. 학술대회의 목적에 맞추어 1983년부터 매년 진행되어 온 유서 깊은 행사이지만 약사들은 또 다른 기대를 갖고 참석합니다.
바로 제약회사들이 부스에서 제공하는 굿즈입니다. 제약회사들은 신제품을 홍보하면서 물티슈, 펜 등의 제품을 프로모션 상품으로 제공합니다. 흔히 다이소에서 구매할 수 있는 저렴한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증정품이라고 하면 일단 기분은 좋아지니 모든 부스를 돌며 굿즈를 수령합니다.
예전에 많은 제약사들이 참여했을 때에는 굿즈가 조금 더 화려했습니다. 휴대용 선풍기, 계산기, 자외선 칫솔 살균기 등등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고 가지고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구미가 당기는 제품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증정 파격적인(?) 증정 행사가 다소 누그러든 느낌입니다.
올해 춘계학술대회 역시 수확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부스에서 펜 한 자루씩만 증정하였기에 저는 펜만 잔뜩 손에 쥐었습니다. 같은 병원 약사들끼리 테이블에 앉아 수확물을 펼쳐놓고 서로 무엇을 받았는지 확인을 했습니다. 조금 좋은 펜은 다이소 기준 2000원짜리, 그저 그런 펜은 다이소 기준 1000에 세 개가 들어있는 펜. 그런데 저는 조금 일찍 부스를 돌았기에 소형 달력도 받았습니다.
6월이었음에도 2025년 달력을 이제야 받는다는 게 조금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다른 곳에서 프로모션 하고 남은 거 우리한테 주나 보다.라는 자조 섞인 말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첫 장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넘기며 달력에 그려져 있는 그림과 날짜에 적힌 내용들을 읽어 나갔습니다.
보통 연말에 이듬해 달력을 받아 훑어보는 것과는 달리 이미 한 해의 절반이 지난 시점에서 달력을 보는 것도 색다른 매력인 것 같습니다. 천천히 넘기며 1월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2월에는 무엇을 했고. 정확히는 기억나진 않아도 먼 과거는 아니었기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기억이 애잔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힘든 일, 즐거운 일 모든 게 잔잔히 느껴지기만 하였으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 점이 될 것 같아서 마음 한편이 아린 느낌도 들었습니다. 날짜가 적힌 격자모양의 작은 칸에 그날의 기억이 꾹꾹 눌러 담겨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리고 느꼈던 사실 하나 더. 우리나라는 일괄적으로 월(月)을 지칭할 때 숫자를 사용합니다. 1월, 2월 이런 식으로. 그런데 서구식 달력은 모든 월에 그만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했습니다. 숫자로 각 월을 지칭하는 것은 보다 직관적이지만 서구식 달력처럼 매 월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조금 더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 월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1월> Janurary
한 해의 문을 여는 1월은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Janus)에게 바쳐진 달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얼굴은 과거를, 다른 얼굴은 미래를 바라보는 신입니다. 로마인들은 해가 바뀌는 이 시점에, 야누스에게 새로운 시작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January는 단순한 달이 아닌,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경계의 시간입니다.
<2월> February
겨울의 깊숙한 시기, 로마인들은 2월을 정신적, 육체적 정화와 속죄의 달로 삼았습니다. Februa라는 축제를 통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신들에게 사죄와 정결의 의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죽음, 슬픔, 허물을 내려놓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달. 2월을 거쳐야 본격적인 새해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3월> March
겨울잠에서 깨어난 병사들과 함께 전쟁의 신 마르스(Mars)가 3월에 돌아옵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이 달에 군사 훈련을 시작하며 새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실제로 로마력의 원래 첫 번째 달은 3월이었습니다. 봄의 생명력과 함께 터져 나오는 전사의 기백. March는 활력과 충돌, 시작과 의지의 달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릴 때 May와 매번 헷갈렸던 기억이 있는 달입니다.
<4월> April
4월 April의 어원은 명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열다'(Aprerire)에서 왔다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땅이 열리고, 꽃망울이 터지고, 새 생명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어원으로 추측되는 것은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Venus)와 관련된 달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사랑, 아름다움,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찬 이 달은, 자연의 여신들이 무도회를 여는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5월> May
May는 Maia라는 봄의 여신에게 바쳐진 달입니다. Maia는 젊고 풍요로운 대지의 여신으로, 성장과 번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Maia의 이름은 크게 자라다(Grow)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로마인들은 이 달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기도하며, 자연의 생장과 풍요를 축복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청춘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6월> June
역시 7월 July와 가장 헷갈렸던 달입니다. June은 로마 여신들 중 가장 강력한 존재인 주노(Juno)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녀는 결혼, 출산, 여성의 삶을 관장하던 여신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6월의 신부'가 좋은 징조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로마인들에게도 이 시기는 가문과 미래를 이어나갈 신성한 결합의 시기였습니다.
<7월> July
원래 7월의 이름은 Quintilis, 즉 다섯 번째 달이었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태어난 달이자, 그의 달력 개혁(율리우스력)이 이뤄진 달이라 그의 이름은 따서 July가 됩니다. 사후에도 그의 이름이 시간을 지배하게 만든 것, 로마인들이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여겼는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8월> August
Quintilis 다음은 Sextilis, 여섯 번째 달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첫 번째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Augustus) 역시 영원한 권위를 남기기 위해 자신의 업적이 집중된 이 달을 August라 이름 붙입니다. 거룩하다(Augustus)라는 이름처럼, 황제의 권위가 달의 이름으로 승화된 사례입니다. 그리고 이 달은 그에게 맞춰 31일로 늘어나, July와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아빠도 31일, 아들도 31일인 셈이죠.
9월부터는 숫자의 어원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원래 로마력은 현재 3월이 첫 달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겨울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정지된 시간이라 여겼기에 시간의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겨울을 버린 달력에 문제를 느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로마의 두 번째 왕이며, 매우 종교적이고 천문학에 밝은 철학자형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는 신들의 가호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해의 모든 날은 신성해야 하며, 겨울 또한 시간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
그래서 그는 겨울의 빈 공간을 1월(January)과 2월(February) 두 달로 나누어 새로 만들었습니다. 두 달이 앞에 추가되면서 모든 달의 순서가 뒤로 밀렸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아 고대력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9월> September
Septem, 즉 7을 의미합니다.
<10월> October
Octo, 즉 8을 의미합니다.
<11월> November
Novem, 즉 9를 의미합니다.
<12월> December
Decem, 즉 10을 의미합니다.
달력은 날짜를 표시하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앞으로의 계절을 상상하게 하며, 그 안에 담긴 언어와 신화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 줍니다. 펜 몇 자루와 작은 달력 하나. 그날 학술대회에서 가져온 것은 그것뿐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기억 하나와 낭만 하나가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독자분들도 이미 지나온 달력의 시간을 한번 천천히 읽어 보시는 건 어떠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