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더운 여름열기를 헤치고 병원으로 들어오면 시원한 바람이 열기를 훅 가라앉힌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잔잔히 등에 남은 습함도 사라진다. 그래봤자 고작 1분이다. 지하 2층에 다다르고 다시 가운을 챙겨 입으면 또 더위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이리저리 오가며 업무를 하다 보면 이마와 등에 땀이 느껴진다. 목에 걸칠 수 있는 선풍기를 트니 한결 나은 것 같다. 왜 나는 열이 이렇게 많을까? 요즘 살이 조금 쪘다지만 그걸로는 설명이 안된다. 한창 말랐을 때도 열은 분명 많았다. 체질적인 문제임이 분명하다. 이 많은 열이 어디서 온 것일까?
아침을 먹진 않으니 어제 먹은 음식이 열로 다 바뀌는 것일까?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았다면 몸에 어딘가에 축적되어 있는 지방이 열심히 타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새삼 몸뚱이가 신기하기만 하다. 어쨌든 지금 나를 만든 것은 음식이니까. 적당히 조리된 음식을 입에 넣으면 공장처럼 일련의 과정을 거쳐 열이 만들어진다. 에어컨의 실외기처럼 무언가 일을 하다 보니 열이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이 열이 여름 나기를 정말 정말 힘들게 한다.
그래도 나이가 드니 그 열이 조금은 덜한 것 같다. 자동차로 치면 이제 달 까지는 다녀왔을 거리가 됐으려나 싶다. 그 정도의 거리를 달리면 아무리 품질 좋다는 외산 차들도 잔고장이 있기 마련이다. 잔고장이 없다 해도 기능이 점점 떨어지게 된다. 지금 내가 몸뚱이가 그러한 것 같다. 식탐은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살아있는데
그대로 음식을 입안에 집어넣는다 한들 푹푹 늘어지기만 할 뿐이며 젊을 때 보다 제 힘을 잘 못쓰는 것 같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조금 서글퍼진다.
이따금 기계가 고장 났을 때 두 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서비스센터를 가서 어떻게든 살릴 것인가. 또는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보내고 새 제품을 살 것인가. 대부분은 비용을 생각하여 저울질하게 된다. 그런데 고치는 것이 새 제품을 사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게 되는 경우 아쉬운 마음은 있겠다만 큰 고민 없이 새 제품을 구매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런데 내 몸뚱이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새로운 몸뚱이는 있을 수 없다. 그저 고치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여 고치지 않고 그냥 서랍에 고이 모셔두는 소극적 파업도 있을 수 없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대가를 요구 한다. 비용이 많이 들어도 어찌 됐든 고쳐야 한다. 죽을 때까지 일 해야 하니까.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손상이 되었을 때, 죽음이 정말 실감이 날 때 즈음에는 어떨까. 그때도 나에게는 열이 많이 남아 있을까. 지금 이마에 흐르는 땀에 대해 감사히 생각해야 해야 하는지. 감사함을 느껴야 하는 비교 대상이 대단히 열화 된 몸뚱이라니. 그것마저 서글퍼진다. 왜 나는 열이 이렇게 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