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는 환자를 대상으로 복약지도를 수행합니다. 복약지도는 단순한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때로는 환자와의 짧은 만남 속에서 신뢰를 쌓고, 약물 치료의 가치를 함께 공유하며, 어떤 경우에는 무언의 시험을 치르기도 합니다.
약사로 일하며 가장 반가운 순간은, 약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관심을 갖는 환자를 만날 때입니다. 그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화가 깊어지고 나누는 정보가 쌓이면서 저 자신도 더 몰입하게 됩니다. 약에 대한 설명을 더 잘해드리려 애쓰게 되고, 환자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 뿌듯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이 가끔은 '검증'으로 전환되기도 합니다. 환자 혹은 보호자의 마음속에 '이 사람, 진짜 약사 맞아?'라는 의심이 들어설 때입니다. 이 글은 제가 병원에서 복약 지도를 하며 겪은, 약사라는 직업이 시험대에 올랐던 몇 가지 순간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첫 번째 일화는 한 내과 교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코로나가 휩쓸고 간 어느 날, 심한 감기로 진료를 받으신 한 중년 여성이 마약성 진통제인 코데인을 처방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건덴 약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물었습니다.
"이거 마약성 진통제인데 왜 처방된 거죠?"
그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질문의 날은 예리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어라?' 싶었습니다. 코데인은 진통 작용도 있지만 중추 억제 작용을 이용해 진해제로도 사용되는, 감기 처방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약입니다. 사복 차림이라 명찰은 없었지만, 이름과 얼굴을 보니 내과 교수님이셨습니다. 코데인 처방에 익숙하실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아 이건 질문이 아니라 시험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아마 저를 처음 보셔서 그러셨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일반 환자에게 설명하듯, 최대한 알기 쉬운 말로 코데인의 기전과 사용 이유에 대해 풀어 설명드렸습니다. 교수님은 "아 그렇군요"라고 짧게 대답하셨고, 약을 받아 조용히 돌아서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험이 그렇게 조용하고 품위 있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유방암 환자와의 일화입니다. 처음 암 치료를 시작하는 환자는 암 교육을 진행하게 되는데 미리 환자 교육을 마친 간호사 선생님이 제게 귀띔을 주셨습니다.
"이 환자분, 조금 힘드실 수 있어요."
그 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환자는 작고 살짝 해진 흔적이 보이는 노트를 들고 교육실에 들어왔습니다. 첫눈에 보기에도 준비된 분이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암교육이 시작되자 환자는 노트에 적힌 문장을 읊듯이 읽으며 연달아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으나 아마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환자는 고개를 살짝 틀고 '스읍'소리를 내며 고개를 젓곤 했습니다.
그 분위기는 학회의 날 선 질의응답 시간과 같았습니다. 평소라면 간단히 설명드리고 지나갈 수 있는 우울증 치료제와 호르몬 치료제 간의 상호작용 문제에 대해, 이 환자분과는 무려 한 시간을 논쟁했습니다. 약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할 수 없는 노릇이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주 지엽적인 질문에 마침내 저도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정확한 답이 어렵습니다. 확인 후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이 말이 끝나자, 환자분은 제 눈을 똑바로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약사 맞나요? 이런 걸 왜 몰라요?"
그 말에 잠시 멈칫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삐져나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썼고, 환자가 돌아간 뒤에도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환자에겐 마지막까지 친절히 응대하는 어려운 미션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매번 완벽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약사라는 이름 아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때로는 침묵이 답이 되고, 때로는 모른다는 말이 오히려 용기가 되는 순간도 있습니다. 수많은 시험 속에서 중요한 건 정답보다는 태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언젠가 또다시 '당신 약사 맞아요?'라는 말을 듣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응대할 수 있는 제 모습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