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처음 뵙는 분들과 통성명을 하는 자리를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저를 병원에서 근무하는 약사라고 소개를 합니다. 그러면 그들 중 다수는 병원에도 약사가 있냐고 되려 궁금해하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의 경우 일반인들은 병원에서 약사를 만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약사는 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만약 제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응급실에 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저는 응급실 침대를 배정받습니다. 이윽고 간호사 선생님이 제 상태를 묻습니다.
"환자분 배가 어떻게 아프세요?"
"오른쪽 아랫배가 너무 아파요"
이런 식으로 대화가 오갑니다. 간호사 선생님은 마치 형사가 용의자를 심문하듯 저의 과거 행적(?)을 샅샅이 파헤칩니다. 일단 배가 아프니 무엇을 먹었는지, 종종 이런 증상이 있었는지 또는 갑자기 이런 증상이 나타났는지, 현재 복용 중인 약물이 있는지 등등 최대한 많은 정보를 세세히 묻습니다.
이윽고 이 차트를 바탕으로 의사 선생님과 본격적인 문진이 시작됩니다. 의사 선생님은 청진기를 저의 배에 가져다 댑니다. 또 저의 배를 이리저리 눌러보며
"아픈가요?"
"여기는 어때요?"
하고 묻습니다.
저는
"아야!"
하며 괴로워하죠. 맹장염일까요?
"일단 통증부터 잡아드리고, 정밀 검사를 해보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전산에 처방을 탁탁탁 입력합니다. 케토롤락 30mg 근육주사, 혈액검사, 복부 CT, 수액 등등. 이 순간! 환자들이 지하 2층의 약국에서 약제부의 한 컴퓨터에서 처방전이 출력됩니다. 이제 약사들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저는 케토롤락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예전에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다가 크게 곤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차트에 그 내용이 있었나 봅니다. 약사 선생님은 즉시 이 처방을 포착합니다. '어? 이분 케토롤락에 알레르기가 있으신데?' 눈이 번뜩입니다. 셜록 홈스가 단서를 발견했을 때처럼 말이죠.
결국 의사 선생님에게 전화를 겁니다. "선생님, 죄송한데 샤토디님 케토롤락에 알레르기 있으신 것 같은데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의사 선생님은 과거 기록을 다시 검토하시고 처방을 수정합니다. "케토롤락 대신에 트라마돌로 처방 변경하겠습니다."
드디어 모든 검토가 끝나고 변경된 처방에 따라 간호사 선생님이 주사를 들고 나타납니다.
"주사 맞으실게요~" 저는 '아이고, 드디어!'라고 안도하지만, 이 주사 한 대가 나오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모릅니다.
시간이 흘러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행히 맹장염은 아니고 단순장염이라고 합니다.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단순장염이기에 의사 선생님은 퇴원약으로 항생제, 소화제, 진경제를 처방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처방이 약국으로 전송되는 순간, 갑자기 화면에 빨간색 팝업창이 떠오릅니다.
<중복투약 경고! 환자가 5일 전 시프로플록사신 500mg을 7일분 처방받았습니다. 현재 처방: 레보플록사신 500mg 3일 같은 계열 항생제 중복 처방입니다.>
저는 며칠 전 동네 내과에서 감기 기운이 있어서 항생제를 처방받았는데, 응급실에서는 그걸 깜빡하고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뭔가 먹고 있었는데... 감기약이었나? 뭐였더라?" 하고 애매하게 넘어갔던 그 약이 바로 항생제였던 거죠.
이에 즉시 의사 선생님에게 연락합니다. "선생님, 샤토디님 며칠 전에 다른 병원에서 같은 계열 항생제를 처방받으셨네요. 어떻게 할까요?" 이에 의사 선생님은 "아, 그렇군요. 그럼 항생제는 빼고 소화제랑 진경제만 처방하겠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만약 이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환자는 같은 계열의 항생제를 중복으로 복용하여 불필요한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소 단적이기도 하고 단순해 보이긴 하지만 위와 같이 약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합니다.
“약사요? 그냥 약 주는 사람이잖아요.”
아마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병원약사의 역할은 단순히 ‘약을 건네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책임도 큽니다. 약사는 치료의 마지막 단계를 책임지는 동시에, 그 과정의 빈틈을 메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병원약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업무는 '조제'입니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조제하고, 복용 방법을 안내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환자의 나이, 체중, 간 기능, 신장 기능 등을 고려해 용량을 조절해야 하고, 약물 간 상호작용이나 중복 투약 여부도 꼼꼼히 검토해야 합니다. 특히 주사제의 경우 정밀한 계산과 무균 조작이 필수입니다. 항암제처럼 독성이 강한 약물은 극소량의 오차로도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방 확인부터 조제, 투여 전 이중 확인까지, 약사는 '검토에 검토를 거듭하는 전문가'입니다.
병원약국에는 수백, 수천 종의 약이 들어오고, 나가고, 보관됩니다. 약이 부족하면 진료가 지연될 수 있고, 반대로 불필요하게 쌓이면 낭비가 됩니다. 약사는 약의 재고, 유효기한, 보관 온도, 냉장 약품의 상태 등을 전반적으로 관리합니다. 특히 마약류나 향정신성 의약품은 법적으로도 엄격한 관리가 요구되며, 이중 잠금, 사용 이력 기록 등 고도의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약 창고 하나에도 시스템과 관리 능력이 총동원됩니다.
약사는 단순히 약을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 병원의 ‘약물 전략’을 세우는 데도 참여합니다. 항생제 적정 사용, 신약 도입 검토, 감염 관리, 약물 이상반응 보고 체계 구축 등 각종 위원회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냅니다. 의료진에게 최신 가이드라인이나 약물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약사의 역할입니다. 현장에서 눈에 띄진 않아도, 병원 운영의 중요한 톱니바퀴 중 하나입니다.
병원약사는 임상시험에도 깊이 관여합니다. 임상시험이란, 새로운 약이 사람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시판되기 전의 신약이거나, 기존 약물의 새로운 용법·용량을 검증하는 경우도 포함됩니다. 시험약은 일정한 온도와 조건에서 보관해야 하고, 정확한 용량으로 조제되어야 하며, 프로토콜에 따라 지정된 시간과 방법으로 투여되어야 합니다. 환자와 직접 마주하진 않더라도, 새로운 치료법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병원약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약사들의 역할은 다양합니다. 다음에 병원을 방문하실 일이 있다면, 직접 얼굴을 마주하진 않더라도 어딘가에서 여러분의 건강한 치료를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약사가 있다는 걸 한 번쯤 떠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약사의 역할이 잘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