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약사입니다. 한 번 이직을 하였고 올해 8년 차가 되었습니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매일 출근길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병원 입구에서 고개를 들어 병원이 얼마나 높은 지를 확인합니다. 대략 저기는 수술병동, 저기는 단기입원병동, 저기는 중환자실. 요즘 워낙 고층 건물들이 많기에 지금 근무하는 병원은 그리 크다 느껴지진 않지만 저들 중 한 칸은 내가 일하는 공간이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햇살이 내비치는 공간에서 일하고 싶거든요.
이제 살짝 고개를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지하 1층 입구를 지나면 제과점에서 막 구운 빵냄새가 저를 반깁니다. 빵냄새를 천천히 즐길 새도 없이 늦지 않을까 얼른 지하 2층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향합니다. 제가 일하는 약제부는 지하 2층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처방된 약을 준비합니다.
대부분의 종합병원의 약제부는 지하에 위치해 있습니다. 왜 하필 지하일까요?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병원은 언제나 공간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설계를 잘한다고 해도 병원을 운영하다 보면 공간이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중 환자를 위한 병상, 진료실, 검사실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약제부처럼 직접적인 환자 대면이 없는 부서는 자연스레 '명당' 자리 경쟁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게 됩니다. 물론 약제부에서도 환자를 자주 접하는 원내약국의 경우 1층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원내약국을 제외하면 상시 환자들과 대면하는 부서가 아니기에 '비접촉 부서'라는 이유로 지하로 내려가게 됩니다.
두 번째는 보안과 안전의 이유입니다. 약제부에서는 다양한 의약품과 고가의 항암제, 의료용 마약류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약들은 보안, 통제가 필수적이기에 오히려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되는 지하가 적합합니다. 만약 영화처럼 복면을 든 강도들이 약을 갈취할 목적으로 병원에 뛰어들었을 때, 약국이 1층에 덩그러니 있다면 그들은 수억 원쯤은 쉽게 넘는 고가의 약을 편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괴를 지하금고에 보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아침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고 있는지는 휴대폰의 시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출근할 때 날씨가 유난히 맑더라도 퇴근길에 병원문을 나섰을 때 한참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이한 적도 있습니다. 한참 쏟아지는 빗줄기의 소리가 귀를 때리고, 물기를 잔뜩 머금은 축축한 공기가 피부에 닿으면 마치 다른 세계에 살다가 돌아온 느낌도 듭니다. 그렇게 지하에서 우리는 시간과 날씨의 감각을 하나씩 잃어갑니다.
하지만 이 공간이 늘 음울하고 무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도 사람은 있고, 사람들 사이엔 끈끈한 관계가 온기가 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식사 후 약제부 입구 쪽에 마련된 네 칸짜리 의자에 앉습니다. 자리가 부족하면 의자를 가져와서 좁은 공간일지라도 모두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 대해 나누기도 하고, 환자에 대해, 처방에 대해, 조제 중 생긴 소소한 해프닝, 가족과의 문제, 애인과의 문제... 별 것 아닌 대화가 이어지지만 사람 냄새가 짙게 남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더 자주 확인하고, 더 가까워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정말 좋은 날에는 탈의실에 들러 가운을 걸어두고 밖으로 향합니다. 병원 옆 학교의 작은 호수를 돌며 우리의 시간도 흐른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합니다. 짧지만 강렬한 햇빛을 맞아들이는 시간은 우리가 지하에서 보내는 시간의 균형을 맞춰주는 작은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묻습니다. "지하에서 근무하면 갑갑하지 않아요?"라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창문 없는 공간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천장도 낮고, 자연 채광이 전혀 없는 공간은 때로 우울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의미를 만들어 나갑니다. 매일 수백, 수천 건의 처방전을 소화하면서도 서로의 컨디션을 살피고, 작은 실수 하나에도 모두 함께 책임을 나눕니다. 조용히, 묵묵히, 하지만 단단하게 버텨내는 힘. 그것이 지하 2층 약제부 사람들이 이러한 환경을 견뎌낼 수 있는 근원입니다.
오늘도 누군가가 지상에서 햇살을 누릴 때, 저희는 지하에서 빛을 만들어냅니다. 그 빛이 사람들을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누구보다 책임감과 보람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지하 2층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