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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트랄 Nov 20. 2024

정의로운 삶-2

2. 수포자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찰나

'아아악!!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ᆢ'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했다. 이건 대체 뭘까, 악마의 유혹인가? 이건 내게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문득 단테의 '신곡'이나, 괴테의 '파우스트'를 떠올렸다.


아. 고2인 내가 어떻게 그런 고전들을 아느냐고? 나는 뼛속까지 문과생이며, 초등학교 시절부터 독서교육을 엄청나게 강조하신 부모님의 영향으로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학은 나에게 영원한 '미지의 영역'이다. 내가 수학 선행을 늦게 시작한 탓이 컸다. 나는 중학 시절부터 고1 때까지만 해도 미친 듯 열정을 다 바쳐 공부방과 학원과 과외를 갈아타며 수학 공부에 매진했지만, 매일 춤추고 노래하러 다니는 내 친구보다 내 성적이 훨씬 더 낮게 나왔다는 것에 분노와 좌절이 폭풍처럼 몰아쳐 결국 수포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드디어 지난 중간고사 수학시험 때  한 문제도 풀지 않고 일명 '기둥 세우기'를 한 덕분(?)에 수학 성적이 6등급을 찍었을 때, 나는 수능 최저만 대충 맞추기로 하고 논술 학원이나 일찍 알아볼까 하던 참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건ᆢ 천재일우의 기회일까? 아니면 안쪽 벽면이 기름으로 칠해진 깔때기 같은 형태인 악의 구렁텅이일까? 머리가 너무 복잡하여, 나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그 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결과들을 한번 정리해 보기로 했다.


1. 당장 내일 시험문제를 학교에 가지고 가서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린다.


->가장 합리적이다. 선생님께선 당장 교무회의나 성적관리위원회를 열어 이 시험문제들을 모두 폐기하고 다시 출제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아마 뉴스 기사 첫머리를 장식하겠지. 학교가 무지 시끄러워질 것이다.


2. 그냥 나 혼자 풀어보고 문제와 답을 모조리 외운 후 완전히 불태워버린다.


->순진이가 알고 있다. 순진이가 나에게 이걸 준 이유는 아마 공범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전교 1등인 순진이는 수학 만점을 받아도 전혀 의심받지 않겠지만 수학 6등급인 나는 당연히 조사가 들어갈 것이다. 순진이가 내 가방에 뭘 넣는 모습을 우연히라도 본 아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순진이가 내게 이런 걸 준 목적이 분명히 있을 거다. '세상에 공짜 없다"라고 하지 않던가ᆢ


3.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순진이가 넣어준 문제집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거다. 그러니 그 안에 시험문제가 들어있었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을 것이고, 내일 순진이가 날 보고 조금이라도 문제집이나 시험 문제에 관해 말하면 그냥


 "무슨 소리야? 뭐 문제집 비슷한 게 있긴 하던데ᆢ 너 나한테 그런 걸 왜 주냐? 나 수학 포기한 거 몰라? 그냥 짜증 나서 방청소 하는 김에 분리수거통에 버렸어!"


라고 둘러대 버리면 되지 않을까ᆢ?


그러나 내 이름은 바로 최정의. 정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검사 출신의 우리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다. 나는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할 정도로 그렇게 나약한가? 만약 순진이가 지금까지 어떤 경로로든, 시험문제를 입수해 왔고, 그래서 계속 전교 1등을 유지한 거라면? 그게 아니라도 어쨌든 순진이는 이미 이번 수학문제를 모두 알고 있다. 내가 이런 엄청난 부정행위를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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