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하린 Aug 21. 2024

내 머릿속의 지우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기억을 잃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 평범하디 평범한 어느 날의 이야기다.


눈을 떴다. 아침이어서도 누가 내 이름을 불러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방 천장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이내 방 안을 가만히 훑었다. 하얀 책상, 작고 아담한 침대, 파란색에 별무늬가 박힌 옷장, 그리고 덮고 있는 이불까지. 소름 끼치게 생소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전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굳어가는 몸과는 달리 심장은 계속해서 쿵쾅거렸다. 꿈은 아닌 것 같고, 분명 현실이 맞는데... 아무리 기억의 파노라마를 돌리고 또 돌려봐도,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뿐. 내가 누구인지, 여긴 어딘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나는 불안과 경계가 가득 섞인 눈으로 방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 문 너머로 누군가 들어온다면, 만약 그럼에도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쩌지? 나는 누구지? 이름은 뭐였지? 어떤 사람이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수많은 질문들이 시끄럽게 쏟아지며 아우성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다음 순간, 문을 열고 40대 중후반쯤 돼 보이는 여성이 들어왔다. "미르야 뭐 해? 얼른 일어나서 학교 가야지!" 나는 한동안 그 여성을 멍하니 쳐다봤다. 역시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미르'이라는 이름 역시도 내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미르가 맞을 거라고 여기며 기억이 곧 돌아오리라 믿었다. 그래서 티 내지 않고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응..." 사실 존댓말을 써야 하는지 반말을 써야 하는지도 몰라 일부러 들릴 듯 말 듯 답했다.


그 여자가 나간 후, 나는 서둘러 씻고 교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작고 아담한 체구에 동그란 얼굴,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살, 순해 보이는 평범한 인상의 여자 아이가 서있었다. 낯선 이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느낌에 나는 소름이 끼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너무 두려워 차라리 빨리 사라지고 싶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다르다는 것을 금방이라도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로 영영 기억나지 않으면 어쩌지? 나는 대체 누구지? 아니 내가 맞긴 한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을 하며 그저 발길 가는 대로 정처 없이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한 학교 앞에 도착해 있었다. 기억은 잃어도 몸은 기억하나 보다. 여기로 들어가야 될 것만 같은 강렬한 기분이 듦과 동시에 내 발길은 관성처럼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한가? 아니 그전에,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이라고 하면 당신은 믿겠는가? 아마 믿을 사람은 없을 테지. 당연하게도 허무맹랑한 상상이나 망상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이 세상에 대해, 자연에 대해, 이치에 대해 당신이 얼마큼 안다고 믿고 있나?


살다 보면 때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지금에서야 그날, 내가 기억을 잃었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건 어쩌면 내가 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인간이 버티기 힘든 기억과 정보를 가졌을 때, 기억은 고의로 그 판도라의 상자를 덮어버리곤 하니까.


그 맘때 내 삶은 고통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던 것도 같다. 모든 게 기묘했던 그날은 신이 내게 주신 교훈이었을까? 혹은 선물이었을까? 아직도 내게 기적이자 재앙이었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기억만 잃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사람의 자아가 전부 사라진다. 내 성격도, 취향도, 그동안 쌓아왔던 수많은 경험과 관계에 대한 데이터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이 데이터로 차곡차곡 만들어온 내 모습 역시 사라진다. '나'를 잃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아주 많이, 무서운 일이었다. 차라리 다 포기하는 게 나을 정도로. 이 세상에 내가 아는 얼굴 하나 없다는 게 사무치게 외로웠고 모든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는 사실이 엄두가 나지 않았으며 나조차 나를 잃었다는 사실이 공포스러웠다.


세상에 나 혼자 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니, 나는 철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혼자였다.


월요일 연재
이전 17화 낙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