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발령지는 시골 학교를 전형적으로 묘사한 영화 선생 김봉두 촬영지인 '오지 중의 상오지 정선'이었다!
남양주에서 차를 타고 굽이굽이 산 넘고 물 건너 학교를 찾아갔다. 태어나 처음 가보는 정선이라는 미지의 세계. 과연 학교 주변은 어떨지, 관사는 괜찮을지. 어마무시한 거리만큼이나 증폭되는 궁금증과 불안감을 한 아름 안고 학교로 가는 길. 도무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남양주에서 정선까지의 거리 약 230km>
한 두 차례 길을 헤매다 끝내 학교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내가 발령받은 학교는 전교생 120명, 한 학년에 한 반씩 있는 6 학급이었다. 그나마도 현재는 전교생이 48명으로 더 줄었다. 이곳도 한 때는 아이들이 북적이는 제법 큰 학교였다고 한다. 사북탄광과 인접한 이곳은 탄광촌으로 1950년대에 개발을 시작해 2004년 폐광될 때까지 재직 광원이 6,300명에 이르고 1987년 석탄생산이 200만 톤을 넘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탄광이었다고 한다. 하여 지나가는 소리로 '이 동네에는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농담도 했더랬다.
#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관사는 무려 학교 정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학교가 1945년 개교했으니, 그때 관사가 지어졌다면 60년은 족히 되었으리라. 21세기 밀레니엄 시대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아직까지 이런 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몹시 당황스럽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일부 증축하여 컨디션이 좋은 방이 두 개 있었지만 나보다 먼저 부임해 온 선생님들이 이미 선점하고 있었기에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설이 낙후돼서 좀 불편할 거라는교감 선생님의 겸연쩍은 안내멘트와 함께 내가 지낼 관사의 문 (반투명으로 방에서 불을 껐는지 켰는지 밖에서 훤히 보이는) 이 열렸다.
맙소사! 내가 판도라의 상자(알아봤자 좋을 게 없거나 위험한 비밀)를 연 것일까? 좀처럼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졌다. 방을 쓰던 남자 선생님은 신규교사가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짐은 얼추 뺀 것 같았으나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담배꽁초와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소주병에 생라면을 부셔 먹기라도 한 건지 쓰레기통이 없는 건지 라면 봉지와 부스러기들까지 바닥에 널브러져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교감선생님은 아차 싶으셨는지 아까보다 한층 더 민망한 표정으로
"남자 선생님이 쓰던 방인데. 청소가 안된 것 같네요. 깨끗하게 청소하면 좀 나을 거예요. 허허."
나는 할 말을 잃고 잠시 멍 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초 긍정 마인드를 끌어올려
"알겠습니다 교감선생님. 청소하면 괜찮아지겠지요."
라고 애써 담담히 대답했다.
# 관사는 귀신의 집
세 평 남짓 되어 보이는 나의 관사는 '귀신의 집'을 방불케 했다.
천정엔 구석구석 거미줄이 쳐져있었고 주방 하수구 냄새가 365일 올라왔으며 세탁기를 놓을 자리도 없었다. 화장실은 정말 좁고 특별히 더 으스스하여 최대한 볼일만 빨리 보고 나와야 했다. 방에는 가구랄 것이 들어갈 공간도 없어 작은 좌식 책상 하나는 책상과 식탁 역할을 했다. 오래된 티브이는 그마저 고장 나 자리만 차지할 뿐이었다. 부모님을 보내고 나서 가져온 이불 한 채를 무심히 깔고 앉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발령을 취소할 방법은 없을까? 발령받자마자 휴직을 쓰는 경우는 없나? 휴직이 뭐가 있더라. 육아휴직? 패스, 질병휴직? 왜 난 아픈 데가 하나도 없는 거냐고. 하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안타깝지 이 현실을 탈출할 묘책은 없어 보였다.
굽이굽이 산골짜기 오지에서, 판타스틱한 관사에서, 교장 교감선생님과 행정실장님을 비롯하여 타지에서 오신 여러 선생님들이 옹기종이 모여 함께 사는 낭만 가득한 직장생활을 상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