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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빛소리 Mar 30. 2024

200배 잭 팟(Jackpot)이 터지다

카지노에서 인생역전?

# 정선은 너무해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스물넷 꽃다운 청춘이 감당하기에 나의 첫 발령지 정선은 여러모로 가혹했다. 

나는 이십 대 중반의 여느 평범한 여자들처럼 옷이나 액세서리 등 이것저것 쇼핑도 하고 싶었고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는 예쁜 카페에 들어가 쌉싸름한 아메리카노와 잘 어울리는 티라미수 케이크 한 스푼의 달콤함도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정선 험준한 산골 마을 어딘가에 홀로 쓸쓸히 유배되어 갇혀버린 나의 현실은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 동네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많았다.

스타벅스는 고사하고 다방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내가 좋아하는 파리바게트는커녕 이름 없는 빵집조차 없었다. 그 흔한 편의점 대신 작고 허름하여 구매 욕구를 떨어뜨리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고, 야근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배달 음식은 오로지 역전에 위치한 자장면 집 한 군데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사는 마을로 오가는 길에는 가로등이 없어 해가 지면 별빛과 달빛만이 반짝였고 은행이나 관공서가 없어 차가 없으면 도무지 기본적인 일상생활도 불가능했다.(덕분에 나는 반강제적으로 스물넷부터 운전을 시작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할 때면, 나는 '선생 김봉두'가 된다.

아이들이 사는 마을 '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세팅장'을 연상케 했다. 

낯선 오지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인근 학교의 젊은 여교사가
급기야 관사에서 벽과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 서울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나는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해 정선에서 근무했던 2년 간 몸이 아팠던 때를 제외하고 주말만 되면 어김없이 서울로 상경했다. 

어떻게든 한 시간이라도 더 늦게 돌아가기 위해 청량리에서 밤 9시 50분 막차를 타고 증산역에 도착하면 새벽 2시. 그나마 제시간에 내렸을 경우다. 멀미 때문인지 버스나 기차를 타면 잠을 잘 자는 편인데, 청량리에서 약 4시간가량 소요되는 기나긴 기차 여행에선 더욱 깊은 수면에 빠져들곤 했다.


어렴풋이 증산역이라는 방송이 귓가에 어른거리는데 너무 오래 자서인지 달콤한 꿈을 꿔서인지 정신은 깼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 서둘러 내리려다가 눈앞에서 열차의 문이 닫힌 적이 두어 번 있었다.
다음 역은 태백. 2~30분 정도 더 가서 내리면 짙은 새벽에 나 홀로 거기에 있었다. 황망한 마음을 부여잡고 택시를 잡아 학교 안에 위치한 관사로 돌아갈 때면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왜 제때 못 내려서 태백까지 와서 추운 겨울 오밤중에 이 고생을 하는지 강한 현타가 오곤 했다.


  이만하면 꽤 많이 잔 것 같다.

다 왔나 싶어 눈을 뜨니 어김없이 원주다. 청량리-원주-증산. 원주는 서울과 정선의 딱 중간쯤 위치한다.


'아, 이제 절반 왔네. 오래 앉아 있어서 엉덩이가 아플 지경인데 왜 아직 절반인거지. 진짜 멀다. 하아...'


# 혹시 강원랜드 딜러예요?


  지금까지 잔 시간만큼 더 자야 도착하겠구나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비어 있던 옆 자리에 언뜻 보아 50은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앉았다. 혼자 앉아서 편히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다른 자리로 가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신경은 쓰였지만 모른 체하고 다시 눈을 감아보았다.


"늦은 시간인데 어디까지 가세요?"


옆에 앉은 낯선 아저씨가 묻는다. 나는 대답하기 싫었지만 안 하기도 애매하여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선이요."


"아, 그래요? 저도 정선 가는데. 이 시간에 정선이면 혹시 강원랜드 딜러예요?"


"아, 아닌데요."


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말고 조용히 내버려 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으나, 이 아저씨는 눈치가 원래 없는 건지 오늘만 특별히 집에 두고 온 건지 계속 말을 건다.


"그럼 이 시간에 정선은 무슨 일로...?"


"근무지가 정선이라서요."


여기서부터 아저씨는 내가 듣는지 안 듣는지는 안중에 없는 듯 본인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지금 카지노 가는 길이예요. 몇 년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운영하던 사업체 두 개 날려먹었네요. 고등학생 딸내미가 하나 있는데 아빠 집 나가라고 한 바탕 난리 나고 집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어요. 저도 끊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손가락 자르면 발가락으로 하는 게 도박이라더니. 아가씨는 절대 카지노에 손대지 말아요. 절대."


  속사정을 듣고 나니 본인도 오죽 답답하면 일면식 없는 사람을 붙잡고 저렇게까지 얘기할까 싶어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 본인은 또 그곳으로 가면서 카지노엔 관심조차 없는 나에게 절대 가지 말라고 훈수를 두는 모양새가 좀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여 그냥 알겠다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 카지노에 가다


  6 학급 작은 학교는 아이들도 교직원도 단출하다.

주말을 보내고 와서 출근하면 하나 둘 교무실에 모여 각자 취향대로 차 한 잔씩 나누며 근황 토크가 시작된다. 나와 같이 발령받은 1학년 담임을 맡은 젊은 남자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본가에 가는데, 이번 주말엔 관사에 있으면서 강원랜드 카지노에 혼자 놀러 갔다 왔다는 얘기를 꺼낸다. 돈을 땄는지 잃었는지 내심 무척 궁금했지만 본인이 얘기하지 않으니 혹시나 실례가 될까 싶어 묻지는 않았다.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설립된 강원랜드는 국내 17개의 카지노 중 유일하게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강원랜드는 카지노뿐만 아니라 호텔과 콘도, 골프, 스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종합레저타운이다.


  같이 근무하는 두 살 위 언니 선생님과 재미 삼아 한 번 놀러 가보자고 했다. 퇴근 후 설레는 마음으로 카지노로 향했다. 학교에서 11km. 차로 10~15분 이동하니 저 멀리 번쩍거리는 건물과 야외 조명이 화려하게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 정선 강원랜드의 화려한 야경>

  난생처음 카지노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는 기분은 마치 어릴 때 롯데월드에서 처음 바이킹을 탈 때처럼 새롭고 설렜다. 입장료 5천 원을 내고 티켓을 끊어 입장했다. 무료로 음료를 무한 리필 할 수 있는 코너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각자 먹고 싶은 음료를 한 잔씩 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딱 5만 원씩만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되었다.

우리처럼 재미 삼아 한번 해보자는 가벼운 생각으로 놀러 온 사람들의 표정에는 웃음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대부분 사람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못해 경직되어 보였다. 두리번거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부터 흠칫 피하게 되었다. 솔직히 '카지노' 하면 간혹 뉴스에서 연예인이 원정 도박을 하여 문제가 된 사례나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떠올라 약간 긴장도 되었다. 아예 투숙하면서 장기로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호기심도 생겼다.

< 돈 먹는 기계들이 즐비한 카지노 >

  돈 먹는 기계들이 순식간에 만 원짜리 지폐들을 쉬지 않고 흡입했다. 누군가는 가방에서 두툼한 만 원짜리 뭉치를 꺼내 칩으로 바꾸어 과감하게 배팅하는 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딱 5만 원 씩만 바꿔서 놀다가 돈이 다 소진되거나 시간이 늦어지면 나가기로 약속했다.


# 고스톱도 칠 줄 모르는데


  둘 다 처음 경험하는 신세계다. 

오락실은 많이 다녀봤지만 할 줄 아는 게임이라고는 고작 테트리스와 틀린 그림 찾기가 전부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게임보다는 몸으로 움직이는 걸 더 좋아하는 나는 자동차레이싱, 펌프(가장 자신 있음), 농구게임, 박자에 맞춰 건반을 누르는 비트마니아, 드럼, 마지막 코스로 코인 노래방(이것도 자신 있음)을 주로 애용한다. 어쩌다 친구들과 보드게임 카페라도 가는 날엔 꼴찌는 단연코 내 차지다. 심지어 나는 휴대폰에 게임이라는 걸 단 한 번도 다운로드하여 본 적이 없다(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가족들이 모이면 한바탕 벌어지는 '한국화의 향연' 고스톱도 칠 줄 몰라 스스로 옆에서 과일이나 깎는 구경꾼이 된다.


  이것저것 다양한 게임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뭐가 뭔지 몰라 둘 다 어리둥절했다. 돈은 뽑았는데 어떤 걸 해야 하나. 일단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구경해 보기로 했다. 2003년 한국드라마 답지 않은 엄청난 스케일일과 이병헌과 송혜교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레전드 명작 드라마 '올인'이 생각났다.

< 카지노를 배경으로 했던 2003년 SBS 드라마 '올인' >


# 테이블 게임과 머신 게임


  카지노에 있는 게임은 크게 '테이블 게임'과 '머신 게임'으로 구분할 수 있다.

테이블 게임은 카드와 칩을 사용하여 딜러와 함께 하는 블랙잭, 바카라, 캐리비안스터드포커, 카지노워, 텍사스홀덤, 쓰리카드 포커가 있다. 카드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여 머리가 아픈 게임인가 싶어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 다양한 테이블 게임 >

  저기 앞에 회전하고 있는 원형 Wheel(회전판)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볼을 회전시킨 후 볼이 Wheel의 특정 번호에 낙착되면 그 번호 또는 구역에 베팅한 플레이어가 당첨되는 룰렛게임이 보인다. 카드 게임에 비해 비교적 간단해 보이는 룰렛에 도전해 보았다.

플레이어가 베팅한 숫자 혹은 숫자의 조합이 Shaker(주사위 용기)에 의해 결정된 3개의 주사위 숫자의 합과 일치하도록 맞추는 게임인 다이사이도 간단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나는 5만 원을 칩으로 모두 바꾸어 두 가지 게임을 시작했다. 카지노 게임이란 게 생각보다는 승률이 높아 보였다. 돈을 여러 번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를 반복하면서 예상했던 것보다는 긴 시간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같이 온 선생님은 칩보다는 머신 게임을 하고 싶어 하여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게임을 하고 만나기로 했다.

< 머신과 다이사이와 룰렛 게임 >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슬슬 배꼽시계의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카지노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시계가 없다. 여기저기 번쩍거리며 돌아가는 기계와 테이블 위에서 알록달록 다양한 색채의 칩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있자면 가뜩이나 정신이 혼미한데, 아마 꿈같은 이 세계에서 현실세계로 탈출하지 못하게 하려는 강원랜드의 고도의 작전이리라.


# 이게 말로만 듣던 잭팟?!


  휴대폰 시계를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기분 좋게 5만 원을 다 소진했고, 언니 선생님은 5천 원이 남았다고 했다. 잘 놀았으니 이제 그만 나가려고 하는데 언니 이 말했다.


", 5천 원 남은 거 마저 다 쓰고 가죠 뭐."


"그래요. 전 다 썼어요. 5만 원으로 재밌게 잘 놀았네요. 하하."


"여기 큰 머신에 5천 원 넣어볼게요."


  기계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5천 원을 소화시킨다. 기계에 5,000원은 4,500원, 4,000원, 3,500원 이렇게 차감되었다. 기계가 마지막 500원을 가리키는 순간,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가 기계에서 울려 퍼진다. 우리는 어리바리하게 이게 뭐지 하고 있는데, 오히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리며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이게 혹시 그 말로만 듣던 잭팟이라는 건가?'


꺅! 우리 예상이 맞았다.

5천 원을 넣고 남은 500원이 잭 팟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잠시 후 100,000원이 찍힌 지폐가 나왔다. 500원이 10만 원이 되었으니 가만히 있어보자...


"200배?!"


  언니 선생님은 10만 원짜리 지폐를 받아 들고는 상기된 목소리로


"우와! 대박이다 진짜. 우리 둘이 5만 원씩 실컷 놀았는데 막판에 10만 원 돌려받아서 가네요. 우리 이걸로 맛있는 저녁 사 먹어요. 하하."


"좋아요! 우리 공짜로 잘 놀다 가네요.  너무 재밌었어요."


비록 '인생역전' 아니었지만 '즐거운 시간' '근사한 저녁 한 끼의 행복' 선물 받았던 그때를 다시 떠올리니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번진다.

<경 고 문>

우연히 맞은 잭팟이 5백 원이 아닌
5천 원이었다면 100만 원,
5만 원이었다면 1000만 원,
50만 원이었다면 1억...?


지금 이 순간 혹시나 머릿속으로 이런 계산을 하며 '인생역전'꿈꾸셨다면, 도박은 중독성이 강하니 카지노 출입은 자제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정선 가는 기차 안에서 사업체 두 개를 카지노에 바치고 집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여전히 늦은 밤 카지로로 향했던 아저씨의 조언 부분을 다시 한번 정독하시며 마음에 꼭꼭 새겨주세요. ^^


♡밤작가 초아의 에세이, 듣다♡

카지노에서 200배 잭팟 인생역전? / 정선가는 기차에서 만난 낯선 남자의 속사정 / 혹시 강원랜드 딜러예요? / 첫 발령지 정선에서 살아남기 / 초등교사 브런치스토리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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