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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빛소리 Apr 01. 2024

1박 2일 학교에 오다

정선이 아름다운 이유

  2007년 9월. 정선 라이프를 시작한 지 어느덧 6개월이 흘렀다. 

관사 생활은 여전히 불편했고 주말마다 서울로 왕복 500km를 오가는 길은 고단했다. 그러나 정선이 아니면 느낄 없었던 풍경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도 정선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 1박 2일 학교에 오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의 초입 9월.

2학년은 2층에 자리하고 있다. 아이들의 편에서 창문은 왼쪽에 있었는데 창 밖으로 운동장과 학교 정문이 훤히 보인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2학년 아이들과 수업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용하던 교실이 술렁인다. 우리 반 남학생이 창 밖으로 눈을 돌리더니 갑자기


"와!"


하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 밖을 가리켰다. 교실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엉덩이가 들썩이던 아이들은 급기야 하나 둘 소리를 지르며 냅다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게 아닌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당황한 나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1박 2일'이라고 크게 새겨진 차량 한 대가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도 곧 아이들의 뒤를 따라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학년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1층에 자리한 교무실과 행정실 직원까지 약속이라도 듯하나 둘 나오고 있었다.


2007년 당시 1박 2일은 전국을 돌면서 촬영을 했는데 '강원도 정선 편' 촬영하러 가는 중에 산속에 자리한 학교가 너무 예뻐 보여서 사전 계획 없이 그냥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산속에 자리 잡은 예쁜 학교 -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김개똥 >

강호동, 은지원, 노홍철 등 방송에서만 보던 연예인들이 눈앞에 나타나 있으니 마치 티브이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전에 예고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이나 들뜨고 어리둥절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목소리 큰 강호동이 MC 답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아이들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기도 하고 선생님들과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가는 길에 잠깐 들른 터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그날은 '연예인을 가까이서 본, 아니 연예인과 가위바위보 한 날'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그 시절 작디작던 꼬마 2학년 나의 제자들은 이제 스물넷 어른이 되어있겠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낼까.

지금은 비록 함께하지 않지만
'1박 2일' 그날의 추억 속에서
이따금씩 우리 만나자꾸나.


# 억새풀은 황금빛 물결이 되어


  우리 학교 바로 앞에는 억새풀로 유명한 민둥산이 위치하고 있다.

가을이면 단풍보다 더 알록달록하게 물든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민둥산은 억새풀이 황금빛 물결처럼 가을바람과 함께 일렁이는 경관을 자랑하는 명소다.

 < 황금물결을 이룬 민둥산 억새풀 - 출처 : 네이버블로그 김개똥>

  우리 학교에서도 친목회 행사로 전교직원이 민둥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웬만한 스포츠는 다 좋아하고 체력도 평균 이상은 된다고 자부하던 나인데 이상하게도 산행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다들 하하 호호 수다꽃을 피우며 즐겁게 오르는데 나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아직 정상까지 꽤 남은 것 같은데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가빠지는 호흡이 심상치 않다.


"저 더 이상은 못 올라가겠어요. 아무래도 먼저 내려가야 할 것 같아요."


"아이고. 박 선생 얼굴이 말이 아니네. 진짜 힘들어 보이는데 얼른 내려가서 쉬어요."


"네. 정상까지 꼭 가보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먼저 내려가볼게요."   


  내가 등산을 힘들어했던 이유는 한참 뒤에 이비인후과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혹시 산 올라가는 거 힘들지 않던가요?"


"아, 맞아요. 다른 운동 할 때는 괜찮은데 유난히 산 타는 건 힘들더라고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래프를 보니까 왼쪽 코 안쪽이 구조적으로 휘어 있어서 산소를 절반 밖에 받아들이지 못해요. 이런 분들 등산은 힘들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던 아름다운 정선 억새풀 황금물결이 일상처럼 가까이에 있었는데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올 가을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아주 천천히 정상까지 꼭 올라보리라.

사람도 떠난 후에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너무 가까이에 있어 그 아름다움을 놓칠 때가 많다.
언젠가 추억이 될 오늘 하루의 일상을
한 걸음 떨어져 조금은 낯설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 두릅나물과 초고추장


  대부분 타지에서 온 교직원들은 관사에서 생활한다. 

한 달에 관사 관리비 5천 원만 내면 집 값은 걱정 없다. 어느 날 저녁, 나이 지긋하신 학교의 터줏대감 격인 행정실 기사님이 교직원들을 호출했다. 행정실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정선 토박이가 많아서 각자 본가에서 출퇴근하셨다. 모임을 좋아하시던 3학년 담임선생님 관사로 오란다.


저녁 모임이니 술이 빠지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술이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친하지 않다. 집에서 거리라도 멀면 멀어서 못 간다는 핑계라도 댈 텐데 문 열고 몇 걸음만 가면 도착하는 그곳에 가지 않을 핑계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발걸음을 옮겼다.


  정선하면 빠질 수 없는 먹거리가 있으니 바로 곤드레 밥과 두릅나물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두릅'이었다. 솔직히 곤드레 밥도 두릅나물도 정선에 와서 처음 접해본 음식들이다. 기사님이 어제 직접 산에서 손수 따온 귀한 두릅이란다. 삶은 두릅이 접시 위에 그득히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초고추장과 함께 소주와 맥주 그리고 사이다까지 친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박 선생, 두릅 처음 먹어본다고? 이게 그냥 사 온 게 아니라 어제 산에 가서 직접 딴 건데 맛이 진짜 일품이야. 건강에 좋은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얼른 하나 집어서 초고추장에 팍 찍어서 잡숴봐."


"와! 이걸 직접 따셨어요? 잘 먹을게요 기사님."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론 이렇게 생각했다.


'이게 그렇게나 맛있다고? 흐음. 육안으로 봐서는 그냥 그럴 것 같은데.'


나는 그날 처음 맛본 두릅의 매력에 완전히 푹 빠지고 말았다.

그 맛을 잊지 못해 그 후로도 두릅을 여러 번 먹어보았지만 그날의 감동은 느낄 수 없었다.

< 두릅나물 - 출처 : 네이버 블로그 한식 쿡쿡 >
어쩌면 내가 찾고 있었던 건 맛있는 두릅이 아니라
좁은 관사에 둘러앉아 기사님이 손수 딴 두릅과 함께
술 한잔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던
그날의 따스했던 정이 아니었을까.


# 깊어가는 정선의 밤


  지금은 가로등이 생겼지만 내가 근무할 당시엔 해가 지면 온 동네가 암흑 속에 묻힌다.

학교 안에는 작은 비닐하우스가 있다. 그 장소에서는 이따금씩 '학교 안 회식'이 열리곤 한다. 허름한 테이블 위 불판에 삼겹살이 올려지고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가 식욕을 돋운다. 


  평소 통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를 즐겨하던 30대 중반 미혼 남자 선생님은 그날도 우리에게 라이브 음악을 선사했다. 

내가 참 존경했던 50이 되신 멋진 교무부장님과 카지노 잭팟의 주인공 언니 선생님과 행정실에서 복무 중인 정선 토박이 남동생까지 둘러앉았다.


  통기타를 선생님이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연주하기 시작한다. 나이도, 연고지도, 성격도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우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느새 한 마음이 되어 눈시울을 촉촉이 적시며 깊어가는 가을밤을 은은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딸아이 결혼식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감에 흰머리가 늘어가네

모두 다 떠난다고 여보 내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듯 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정선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 저마다의 사연으로 빛나는 별 >

  정선을 떠난 지금 나의 삶엔 학교 안 관사 생활의 불편함도, 주말마다 500km나 되는 지난한 왕복기차 여행도 사라졌다. 그러나 산에서 손수 따온 두릅나물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그날의 정겨움과

비닐하우스에서 삼겹살을 구우며 통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했던 밤하늘의 별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찬란히 빛난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아련한 추억은
그리움이 되어 방울방울 가슴에 맺힌다.

♡밤작가 초아의 에세이, 듣다♡

1박2일 강호동과 가위바위보? / 정선이 아름다운 이유 / 억새풀 황금빛 물결 / 두릅나물과 초고추장 / 깊어가는 정선의 밤 / 초등교사 브런치스토리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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