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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빛소리 Mar 24. 2024

내 인생에 재수는 없다

'산 넘어 산' 이라더니

  # 나쁜 시험 임용고시


  2006년 11월. 초등 교사가 되기 위한 필수 관문인 임용 고시가 눈앞에 놓여 있다.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을 경기도에서 보냈기에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기도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그러나 춘천교육대학교 출신인지라 강원도로 임용을 봐야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눈 감고도 붙는다는 운전면허시험도 겨우 63점으로 아슬아슬하게 합격했고, 임용 가산점이 있었던 워드 1급 자격증도 필기시험에서 한 번 떨어지고 두 번째에 합격한 나는, 필기시험에는 도무지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집이 서울이나 경기도인 동기들은 한두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서라도 호기롭게 자기들의 연고지로 지원하기도 하던데, 나는 그나마 믿을 만한 구석인 가산점을 포기하면서 경기도 임용 시험에 붙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능을 볼 때도 다시는 그 지루하고 눈물겨웠던 나 자신과의 싸움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내 인생에 재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죽을 동 살 동 견뎌냈었다. 그런데 매번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이 놈의 시험은 내 인생에서 언제쯤 사라질는지. 임용고시라는 두 번째 산을 어떻게든 넘어야만 했다.


  방대한 교육학과 교육과정,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든 교과서의 지도서를 공부하는 일은 소위 '막노동'에 가까웠다. 대체 뭐가 나올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모의고사를 살펴보니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보이는 내용들이 기출문제로 등장했다. 심지어 교육과정 총론과 각론을 통째로 외워서 써야 할 판이다.


  임용고시는 교사의 자질을 암기력으로 평가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나쁜 시험'이었다. 

가뜩이나 영어 공부할 때 단어를 30번 쓰고 뒷 장을 넘기면 앞장에서 썼던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참담했던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다니! 내가 교육부 장관이 되어 교사 선발 방법을 통째로 갈아엎지 않는 이상 무의미한 한탄이겠지. 이번에도 절대 '재수는 없다'는 일념 하나로 그나마 경기도보다 경쟁률이 낮아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던 강원도로 지원했다.  


# 불안했던 1차 필기시험


  1차 필기시험이 끝났다. 가채점을 마치고 대학교 4년을 원룸에서 같이 생활했던, 나의 룸메이트 과동기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희정아, 시험 잘 봤어?"


"난 생각보다 괜찮게 나온 것 같아. 이럴 줄 알았음 그냥 경기도 써볼걸 그랬나 봐. 집도 여주인데"


"아 진짜? 부럽다. 난 망한 것 같은데. 필기시험은 진짜 나랑 안 맞아."


  음악과 동기들의 점수들을 대략 조사해 보니 나와 필기시험 점수가 비슷한 친구가 한 두 명 밖에 없었다. 대부분 나보다는 점수가 높아 보였다!


'이러다 강원도도 떨어지는 거 아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건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빨리 잊어버리고 면접을 준비하는 게 나의 정신건강을 위한 최선이었다. 면접은 교직 관련 질문과 영어 면접, 그리고 수업 시연이다.


# "어떤 교사가 되고 싶나요?"


  시간은 빠르게 흘러 드디어 면접날이다.

교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험생들의 굳어있는 표정을 보니, 내 심장만 요동치는 건 아니구나 싶어 살짝 안도했다. 내 순서가 다가왔다. 면접에서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어깨를 당당히 펴고 여유로운 미소까지 장착하여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는 5장의 질문지가 놓여있었다. 그중에 2개를 뽑으란다. 로또 번호를 뽑는 것 마냥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나의 운명을 결정 지을 질문지 두 장을 뽑았다. 첫 질문은 초등교육과정과 관련된 닫힌 질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고 하는 이유와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지'를 묻는 열린 질문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크게 변별력이 없었기에, 나는 두 번째 질문에 사활을 걸었다.


  어릴 때부터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보다 초록색 칠판에 흰색 분필로 '1+1=2'를 써가며 선생님 놀이를 좋아했던 일.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을 대신하여 판서를 자원했고 기다리던 음악 시간이 되면 지금은 자취를 감춘 '풍금'으로 애국가 반주도 했으며 자랑스러운 합주부 출신답게 친구들에게 리코더와 단소 개인레슨을 해 주었던 일. 선생님을 돕고 싶은 마음에 각종 심부름을 도맡아 했으며 졸업을 앞둔 6학년 어느 날 교실에 남아 유리창에 딱 달라붙은 각종 스티커들을 커터칼로 떼다가 손가락을 깊게 베였던 사건.


  학습 부진아 출신이기에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으며, 중 1 때 주요 교과 점수가 40~50점이었는데 중 3 때 평균점수 98점으로 노력의 결실을 맺었던 경험은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 무대 공포증이 있어 학창 시절 자진하여 발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내가 대학교 과대표를 하고 졸업연주회까지 마치며 성장했던 모든 경험을 탈탈 털어 '왜 교사가 되려고 하는지'와 앞으로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야심 찬 포부까지 밝혔다.


  모든 시험이 그렇듯 뒤돌아서면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곤 하는데, 면접이 끝나고 면접관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선생님 같은 분이 강원도 교육 현장에 꼭 필요합니다."


    '아, 됐구나!'


  나름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이어진 영어 면접과 수업 시연까지 무난히 마칠 수 있었다.

임용 최종 합격 여부는 1차 필기시험과 논술, 그리고 2차 면접 점수의 총합으로 결정된다. 나보다 1차 필기시험 점수가 높았던 친구가 안타깝게도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음악과 33명 동기들 중 남자 동기 9명이 모두 낙방했으며 최종 합격자는 17명이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다행히도 나는 전체 석차에서 딱 중간쯤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간쯤'이 문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발 빠른 소식통 룸메이트에게 전화가 왔다.


"너 정선 발령 난 거 알아? 너 혼자던데. 어떡해..."


"정선? 거기가 어디야?"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서둘러 네이버 지도에 '정선'을 검색했다. 지도를 나는 '여긴 유배지가 아닌가' 하여 깊은 한숨만 나왔다. '산 넘어 산' 이라더니, 임용고시의 산을 넘으니 또 하나의 더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정선 라이프는 시작되었다.

♡밤작가 초아의 에세이, 듣다♡

학습부진아 출신 초등교사? / 나쁜 시험 임용고시 / 불안했던 필기시험 / 어떤 교사가 되고 싶나요? / 첫 발령지 정선에서 살아남기 / 초등교사 브런치스토리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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