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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작가초아 Apr 23. 2024

커피 포트로 머리 감던 날

고난 총량의 법칙

# 현실판 겨울왕국


  정선은 기본적으로 산 사이의 골짜기이기 때문에 산 꼭대기에서 냉기가 계속 내려오고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진다.

특히 강원랜드가 있는 사북읍, 고한읍 지역은 지역 자체가 해발 600m, 700m에 위치한 데다 주변에는 1,500m의 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10월 말에 얼음이 얼고 4월 초까지도 눈이 내리며 운이 좋으면 5월 초에도 눈이 오는 '현실판 겨울왕국'이다.


  내가 정선에서 발령받았던 2007~2008년은 주 5일 근무제가 격주로 시행되고 있었다.

왕복 9시간 열차와 버스를 타고 2년간 주말마다 정선과 서울을 오갔다. 정선 산골짜기 관사에 사는 청춘의 우울증 예방 차원이었다. 격주로 쉬는 토요일은 '놀토(노는 토요일)'라 불렀는데, 특히 놀토가 아닌 주말은 야속하게도 더 빨리 지나가버리곤 했다.


  유난히 더 추웠던 12월,

그날도 청량리에서 막차를 타고 새벽이 되어서야 관사에 도착했다.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는 관사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런데 온몸으로 느껴지는 한기가 심상치 않다. 찜질방에 있는 얼음방이 생각났다. 주말 내내 집을 비우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온기는 남아있어야 정상이거늘 바깥 온도와 관사 안의 온도에 차이가 없었다.


  보일러실에 가보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던 보일러가 오늘따라 고요하다.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이기에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일단 여기서 오늘 밤을 무사히 넘겨야 한다. 실내 온도가 영하 10도쯤 되는지 방 안에서도 입김이 났다. 샤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세안은 하고 자야겠는데 화장실에 물을 틀었더니 얼음물이 나온다. 물을 조금 묻혀 겨우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이불을 깔았다. 보일러만 믿고 전기장판을 사지 않은 것이 무척 후회스러웠다. 얇은 옷을 겹겹이 껴입고 옷장에 있는 가장 두꺼운 패딩을 장착하고 목도리까지 두르니 오늘 밤 얼어 죽진 않을 것 같다. 양말도 그대로 신은 채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내 모습이 처량해서 울고 싶었는데 오히려 웃음이 났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밤새 많이 뒤척였는지 자고 일어난 머리 모양새가 말이 아니다. 적당히 빗어 보았지만 뒤죽박죽인 머리로 출근하는 것은 스물 다섯 청춘이 허락하지 않는다. 머리를 감아야만 한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얼음물을 머리에 붓는다면 머리카락이 통째로 '고드름'이 되어 똑 부러질까 겁이 났다.


'어떡하지? 이대로 출근할 수는 없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자. 아! 주전자, 아니 포트가 있었지!'


# 커피 포트로 머리를 감다


  내 시선이 커피 포트로 향했다. 

1L밖에 안 되는 작은 포트를 보며 왜 좀 더 큰 걸 사지 않았나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는 생각으로 물을 끓였다. 귀하게 끓인 물을 세숫대야에 붓고 얼음물을 섞었다. 늘 샤워기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에 머리를 감다가 대야에 물을 받아서 머리를 감는 것은 생각 이상의 고난도 기술이 필요했다.


  세숫대야 가득 미지근한 물을 만들어서 머리를 그 안에 담갔다. 

물을 아껴야 했다. 머리에 물을 묻히고 샴푸를 하니 거품이 났다. 다시 그 물에 최대한 물이 한 방울이라도 흘러넘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거품을 헹궈냈다. 한 번에 깨끗하게 헹궈질 리 없었다. 나는 머리에 거품을 남긴 채 다시 포트에 물을 받아 끓이고 얼음물과 적절한 비율로 섞고. 이 것을 몇 번 반복하여 겨우 거품을 다 헹궜다. 매끄러운 머릿결을 위한 린스는 과감히 포기했다. 뻣뻣한 머리를 말리며 매일 이렇게 물을 받아 머리를 감으면 물을 많이 절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건 직업병이겠지. 


  그렇게 머리 감기 미션을 완료한 후 학교에 갔다.

같은 건물 2층에 사는 선생님도 보일러가 한 겨울 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 어젯밤 제일 두꺼운 패딩을 입고 이불속에 꽁꽁 숨어 혹한기 훈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혼자만의 지옥 훈련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험난한 정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동료 선생님들의 존재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 고난 총량의 법칙


  ‘총량의 법칙’이란 전체적인 수량이나 무게가 같다는 법칙이다.

모든 사물에는 총량이 정해져 있고, 그 총량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고난 총량의 법칙'은 일생에 경험하는 고난도 총량이 있다는 것이다. 행복도 불행도 어느 것을 먼저 맞이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행복 속에 불행이 숨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불행이 행복을 창조하기도 한다.


  '진주'는 아름다운 보석이지만 '고통의 산물'이다.

모든 진주는 모래알에 의해 다친 굴이 만들어낸 보석이기에, 다치지 않은 굴은 진주를 생산할 수 없다고 한다. 아름다운 보석이 탄생하기까지는 오랜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다. 나를 아프게 하는 수많은 모래들이 있기에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성장하는 것이리라.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가?

'고난 총량의 법칙' '진주의 탄생'을 떠올리며, 머지않아 다가올 행복을 맞이할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나는 믿는다.
이 시간이 지나면 분명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
영롱히 빛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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