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India, Malaysia, Nepal
3년 만에 다시 인도.
만신창이 상태로 델리 땅을 밟았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며 마날리로 향했었다. 레로 향하던 길에서의 짜이 한 잔, 잊을 수 없는 맛.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것들이 모두 그리워져서 다시 인도로 향했다. 새로운 곳에서 어떤 일을 겪을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 가장 설레는 순간.
경유지인 북경에 두 시간 만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뒹굴거리고, 맥주도 마시고, 좀비처럼 공항 서성이기도 했던 7시간의 경유 끝에 델리로 가기 위해 게이트로 향했다. 이 날은 2016년 12월 31일이었다. 즉, 비행기에서 새해를 맞게 된다는 사실! 이런 날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건 아니지만, 서른이 되는 12월 31일에 북경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기분이 오묘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게이트에 'Canceld'이라는 글자가 떴다! 그리고 전광판의 숫자는 20:40에서 04:00으로 바뀌어 있었다. 캔슬이라면... 취소? 그럼 다시 7시간을 이 공항에서 다시 보내야 한다고?!!
나처럼 기다리던 승객들 모두 멘붕 상태였다. 승무원이 '퐐로퐐로 미'라고 하며 승객들에게 손짓을 했고, 우리는 우르르 승무원을 따라갔다. 근데 정말 문 안에 사람들을 가두더니 전혀 체계 없는 순서로 조금씩 폐쇄된 공간에서 사람들을 내보냈고, 뭐하는지 설명도 안 해주고, 승무원은 영어도 안 통해서 따지기도 힘들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남미 리마에서 항공편 갑자기 취소됐을 때 호텔을 제공받았던 경험이 있어 대충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얼른 호텔 제공받고 싶어 기웃거려도 보고, 항의도 해봤지만, 포기. 거기서 만났던 한국인들과 퍼질러 앉아 지금의 상황에 깔깔대고 웃었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승무원들, 그래서 델리를 둘리 덜리라고 하는 승무원들, 체계 없이 우리를 세워두고는, 그런 우리를 사진이나 찍고 있는 그들.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다시 줄을 서고, 줄 서서 입국 심사를 받고, 공항 기차를 줄 서서 타고, 내려서 Transfer라고 적혀 있을 곳에 또 줄을 서고, 둘리둘리라고 해서 드디어 호텔 가는 차 태워줄 줄 알고 기뻐했으나 또 1층에서 줄 서 버스를 기다리고, 버스 타고 내려서 호텔 프런트에 또 줄을 서고. 이게 8시 이후 12시까지 새해맞이로 한 일이었다. 그리고 호텔 프런트에서 2017년 새해를 맞았다. 정말 체계 없이 사람들 세워두고, 기다리게 하고, 의사소통 하나도 안되고, 엉망진창이었는데. 왠지 그 순간 따뜻했다. 항공사와 승무원들을 욕하며 친해진 승객들끼리 'Happy new year!'이라고 서로 인사하던 그 순간이 참 따뜻했다. 먼 이국 땅에서 이름조차 국적조차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다음날 인도, 델리에 도착. 12시 호텔에 도착해 2시에 다시 공항으로 가야 했던 터라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공항철도를 타고 뉴델리역 도착. 3년 만의 다시 인도. 날 부르고 잡고, 어딜 가냐고 난리다. 길바닥은 소똥에 개똥에 난장판. 길에서 오줌을 싸는 사람도 보인다. 귓가를 때리는 릭샤소리. 내가 진짜 다시 인도에 왔구나, 싶던 순간. 일단 바라나시에 가는 기차표를 끊기 위해 티켓 부스에 물어보니 직원이 플랫폼 1로 가라고 했다. 플랫폼 1로 가니 Tourist Bureau가 보였다. 그런데 화살표 방향으로 따라가도 어디인지 찾기 힘들었다. 헤매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이쪽이란다. 따라가 보니 여행사...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서 정신 하나도 없고, 길은 못 찾겠고 사람들 말은 믿을 수가 없고... 순간 3년 전 델리 빠하르간지에 한글이 잔뜩 적힌 식당에서 라면을 먹었던, 그곳에 한국어를 잘하는 인도인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빠하르간지로 향했다. 길에서 또 엄청 헤맸다. 여기저기 날 도와주겠다고 달라붙는 소리, 그러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진짜 길에 주저앉아 울고 싶던 상황. 겨우겨우 미친 듯이 나 가는 길에 궁금한 게 넘쳐나는 인도인들을 제치고 '쉼터'를 찾아갔다. 그곳에 가니 '쉼터'는 사라지고 'wow cafe'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L군과 K군을 만났다.
사실 이때는 두 사람과 옷깃만 스쳐 지나갔고, 다시 만난 건 바라나시였다. 여행이 끝나고 사진 정리를 하다 와우카페 내부 모습 찍은 사진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고 굉장히 반가웠다. 뭔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예전엔 우연히 옷깃만 스쳤던 사이라는 게.
와우카페 주인에게 기차티켓 예약을 요청했지만, 딱갈(기차표 몇 장을 빼놓았다가 출발 전 비싸게 파는 시스템)은 비싸니 기차역 2층 외국인 창구로 가보라고 했다. 이후로도 수많은 사기꾼에게 속아 여행사로 가는 헷질의 연속 끝에 겨우 외국인 창구를 찾아 바라나시로 가는 표를 예약했다. 인도 기차는 또 처음이라 S랑 AC 중에 뭐 탈 거냐고 해서, 막연히 동남아에서 슬리핑버스를 타면 누워 가서 더 좋았던 기억에 S를 예약했는데, 알고 보니 여기 기차는 다 누워가는 거고 S와 AC의 차이는 에어컨이었다. 그래서 S칸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겨울이었어서 에어컨 없어도 덥진 않았는데, 더러웠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까만 피부의 사람들로 가득한 기차가 처음엔 무섭기도 했지만, 영어가 들리고 시작하면서 갑자기 노곤해지며 잠이 솔솔 왔다. 내 아래칸이 아일랜드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경험해보지 않아 두려운 것. 실제로 경험해 보면 상상은 그저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며 열몇 시간을 이동해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아그라 근처에서 영문도 모르고 가만히 서있었던 터라 아침 7시간 도착 예정이었는데, 오후 4시에 도착한 것은 덤.
인도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길거리에는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기차를 타면 몇 시간 연착은 당연한 일이었고, 바라나시에서는 물도 전기도 끊기기 일쑤였다. 바라나시역에 도착해서 강가로 이동하는 릭샤에서도 사기를 당한 나는 정말 이놈의 나라에 또 왜 와서 개고생인지 온갖 욕을 하며 갠지스강에 도착했다. 갠지스강에는 오묘한 기운이 흐른다. 처음 마주한 갠지스강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강의 오묘한 기운 때문인지, 힘들었던 여정 때문인지, 언젠가 꼭 다시 인도로 돌아와 바라나시를 가장 먼저 가보겠다 결심했던 소원을 이루었던 것 때문인지, 짐도 풀지 않고 강가에 앉아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인도인들에게 갠지스강은 염험한 곳이고 성스러운 곳이다. 그래서 이 갠지스강에 묻히기 위해 죽음이 임박한 인도인들이 갠지스강 근처에서 살며 죽을 날을 기다린다고 한다. 또 산 사람들도 갠지스강의 영험함을 받기 위해 목욕을 하러 이곳에 오는데, 그것이 인도인들의 평생 꿈이라고 하니, 인도인들이 얼마나 갠지스강을 섬기는지 알 수 있다. 인도인들은 사후세계를 믿는다. 불교와 비슷하게 이승에서의 삶이 사후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지 결정한다는 것. 그리고 그중 가장 바라는 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고, 영원한 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를 치를 때 절대 울지 않는다고 한다. 슬퍼하며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망자가 떠나지 못하고 여기에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망자가 남아 떠돌면 망자의 가족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는다. 슬프지만 망자를 위해서 또 산자를 위해서 무덤덤하게 치르는 의식. 바라나시에 있는 동안 매일 밤 화장터에 갔다.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가족이 태워지는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는 사람들을, 타들어가는 시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갠지스강에서는 아침보트를 타며 일출을 보거나 저녁보트를 타며 일몰을 볼 수 있다. 같은 강이라 아침이나 저녁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달랐다. 루트도 달랐고, 풍경도 달랐고,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 생각도 완전히 달랐다. 아침보트에서는 종교음악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수행자들이 경건하게 몸을 씻어내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면 저녁보트에서는 강건너에서 보이는 바라나시가 아름다운 일몰과 함께 펼쳐지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보트를 탈 때 L군과 K군을 다시 만났다.
L군과 K군은 직장동료였다. 직장동료끼리 여행을, 게다가 인도라는 힘든 나라를 같이 왔다는 게 신기했다. 성격도 완전 정반대였다. L군은 침착하고 신중했고, K군은 에너지 넘치고 발랄했다. L군은 평범한 일반 복장이었지만, K군은 인도에서 산 옷을 입고 있었다. 저녁보트를 같이 탔던 사람들과 그날 한국어를 잘하는 인도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밥과 술을 먹었다. 바라나시는 종교적 이유로 술에 엄격한 편인데 한국인들이 모이는 곳은 술이 너그러운 곳으로 변했다. 처음 만나는, 직업도 나이도 다른 여러 사람들과 보드카를 엄청 마시며 우리는 농밀한 시간을 보냈다. L군 K군 둘 다 여행도 참 많이 다녀 본 사람들이라 여행 다녔던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것 같다.
바라나시에는 한 달 이상 머무르는 장기 여행자들도 꽤 많았다. 나도 가능하면 그렇게 머물고 싶을 정도로 그 오묘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는데, 도시 자체는 할 게 많은 곳은 아니었다. 바라나시에 있는 동안 한 것은 가트 한 바퀴 돌고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멍 때리기, 그리고 밤엔 화장터에 가서 멍 때리기였다. 돌다 보면 강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도 만나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돌아다니는 동물들과 강에서 씻겨지고 있는 동물도 볼 수 있었다. 갠지스강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한국인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먹기도 했는데, 바라나시를 떠나는 날 L군 K군과 만나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리고 그때 J군을 만났다. J군 외에도 세 명이 더 있었는데, L군 K군이 바라나시에서 머물며 이래저래 친해진 사람들이었다. J군이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처음엔 J군을 경계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 지옥 같은 인도 물갈이가 시작될 즈음이라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겨우 계란국 하나를 비우고 다시 새로운 도시로 떠나기 위해 기차를 타러 갔다. L군 K군은 아그라로 향했고, J군은 바라나시에 더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자이살메르로 향했다.
사람들은 왜 더럽고, 사기 치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위험할 수 있고, 물갈이도 심하게 할 수 있는 나라에 두 번이나 다녀왔냐고 많이 묻는다. 또 나에게 가장 좋았던 나라가 어디였냐 물으면 '인도'라고 이야기하는 나에게 더 놀란다. 인도여행은 두 번 다 나에게 사람이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 바라나시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마지막날 점심을 먹던 중 친화력이 좋은 K군이 한국에서 다 같이 보자며 단톡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도 여행을 하면서 단톡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이미 내가 갈 도시를 돌고 바라나시로 왔던 J군은 알고 있는 도시에 대한 정보들을 내게 주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는 한국에서 다시 만났다. 7명의 완전체로.
그리고 그 해 L군 J군과 말레이시아, J군과 네팔여행을 함께했다.